[10/31 오늘] 대자보 한 장이 일으킨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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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오늘] 대자보 한 장이 일으킨 종교개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30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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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박…미디어 혁명의 결과

 

1517년 10월 31일, 독일 동부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이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라는 34세 수도사가 쓴 라틴어 글이었다.

내용은 교회가 돈을 주면 죄를 사해 준다며 면죄부(免罪符)를 팔아 부당하게 이권에 매달리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 게 골자였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황청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로마 산 피에트르 성당 수리를 위해 면죄부를 팔아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게다가 교황청은 독일 금융가문 푸거가에 빚을 갚아야 할 입장이었다.

면죄부 판매는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독일에서 많이 이뤄졌는데, 당시 한 신부는 "헌금이 상자 속에서 찰랑 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은 지옥불 속에서 뛰어나온다"고 설교하며 면죄부 판촉 활동을 벌였다.

이에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던 젊은 수도사 루터가 나서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루터의 비난은 교황청을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위키피디아

 

독일에서도 한적한 시골에서 일개 젊은 수도사가 쓴 글이 역사적으로 큰 파장을 미쳤다. 이른바 종교개혁이 이 대자보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TV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 항공기나 자동차가 없던 500여년 전에 어떻게 이 글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을까.

그 첫째는 그 무렵 유럽에서 인쇄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했다는 점이다. 1440년경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인쇄술에 혁명을 일으켰다.

책자와 문서를 손으로 베껴쓰던 시절에 금속활자 인쇄기가 발명되면서 대량복제되었다. 매스미디어란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면죄부가 인쇄술에서 대량생산된 것이라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대량 인쇄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약에 배포되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터의 위험한 생각은 활자로 인쇄되어 유럽인들 마음속을 진동시켰다. 이후 10여년 동안 독일에서 간행된 저술 가운데 3분의 1이 루터의 저작이었을 정도로, 그그는 누구보다도 인쇄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훗날 간행된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서도 인쇄술 덕분에 널리 보급되어 현대 독일어를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 /위키피디아

 

둘째 카톨릭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루터는 종교 혁명을 의도하지 않았다. 이미 갈라지기 시작한 교회의 분열의 틈에 그의 주장이 파고들어 종교개혁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1054년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 정교와 로마 교회로 갈라져 대립했고, 1439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1378년부터 1418년까지 서방 교회 내부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시골뜨기 수도사의 과감한 도전장이 던져졌다. 보수적인 요한 에크(Johann Eck)가 로마 교회의 정통성을 앞세워 루터를 비난했을 때, 독일의 젊은 신학자들이 루터의 편을 든 것은 로마 교황청의 지배력이 그만큼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이 나온지 2년후 1519년 7월 라이프찌히에서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에크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루터가 한 발언은 로마 교황청의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감히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에 대해 파문 처분을 내렸다. 파문을 받으면 성직이 박탈되고, 교회가 나갈수도 없다. 심지어 장례식도 치를수 없는 치명적인 벌이었다.

하지만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의 독일어 성서는 무수한 방언으로 흩어져 있던 독일어를 통일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 마르틴 루터 초상화 /위키피디아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린다. 파문을 당한 상태였지만, 당시 수도사는 결혼을 하면 안되는 시절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 신부는 16세 연하로 한 때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반대했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루터는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러한 생각이 후에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1530년대에 루터는 유럽 사회에서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1546년 그는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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