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오늘] 바덴바덴 맹약…日 전쟁광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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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오늘] 바덴바덴 맹약…日 전쟁광들의 모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27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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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총사와 11인 멤버’…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일으켜

 

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인 1921년 10월 27일, 일본 육사 16기 출신 소령 3명이 독일 남부 바덴바덴 스테파니 호텔에서 만났다.

그 세 명은 ① 나카다 데쓰잔(永田鐵山) ② 오바타 도시로(小畑敏四郞) ③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였다. 당시 나이는 36~37세. 이들은 러일전쟁에 종군하지 않은 후배 세대로, 군 내부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으로 키워졌다. 일본은 당시 다수의 중견 장교를 유럽에 파견해 1차 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하면서 배우도록 했다. 세 군인은 독일에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바덴바덴에 모인 세 사람은 유럽 정세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이들은 앞으로의 전쟁은 군인만이 총검으로 싸우는 형태가 아니라 전차와 항공기를 투입하고 국토 전체를 전장으로 삼으며, 국민 모두가 전쟁에 동원되는 국가총력전이라는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長州) 출신 파벌을 쫓아내고 육사 출신으로 대체하는데 뜻을 같이 했다.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낸 밀약을 ‘바덴바덴의 맹약’이라 한다. 또 세 사람은 스스로를 삼총사라는 의미의 ‘삼바가라스’(三羽烏)라고 불렀다. 이는 후에 한국군의 하나회처럼 일본제국주의 군부에 사조직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 일본군 11인 멤버인 도조 히데키,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이시와라 간지. (좌로부터) /위키피디아

 

세 사람은 실천에 들어갔다. 우선 아랫기수인 17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끌어들였다. (도조는 1940년 육군대신이자 총리대신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해 후에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도조가 참가한 네 사람은 같은 연령대 동지를 모았다. 15기에서 18기까지의 육사 선후배가 영입되었다. 이들은 11인의 멤버를 구성한다.

이들은 1923년 가을부터 매달 한두차례씩 회합을 갖기 시작했다. 함께 모여 새로운 군사지식을 교환하고, 때론 육군의 정책에 사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국가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도쿄 시부야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후타바테이(二葉亭)에서 만나 프랑스 요리를 먹는다는 명목으로 동지를 모았다. 이때 만들어진 모임이 이엽회(二葉會)다.

이들은 모임을 확대해 후배 21~25기까지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토론 주제는 다양했다. 전쟁론, 만몽(滿蒙) 개발론, 군내 개혁론등이 논의되었다. 이중에서 만주와 몽고에 대한 권익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최대관심사였다. 만몽 지방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많은 피를 흘려 획득한 곳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1927년 11월의 어느 목요일, 모임에 참가한 18명의 장교들은 목요회(木曜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목요회에서는 미일 전쟁론이 대두됐다.

“일-미 전쟁은 항공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세계 최종전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기려면 중국과 인도차이나를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20~30년간 전쟁 지속이 가능하다, 선행조치로 만주와 몽고를 지배해야 한다.”

이들 사이에 만몽영유론(滿蒙領有論)이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이엽회의 나카다와 도조는 목요회의 멤버이기도 했다. 후배들로부터 두 모임을 합치자는 얘기가 나왔다. 목요회는 1929년 4월 12회 모임을 끝으로 이엽회와 통합했다. 1929년 5월 19일 ‘하루 저녁을 살더라도 일본제국을 위해서!’란 뜻의 잇세기카이(一夕會)로 통합했다. 육사 14기~25기 41명. 30~40대 중반 육군 엘리트 소령에서 대령으로 전원 육군대학 출신이었다.

 

이 초비밀의 이너서클 장교 다수가 일본 점령하의 만주로 건너갔다. 그들에겐 만주가 열쇠였다. 관동군에 편성된 11인 멤버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범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만주와 중국에서 저지른 일은 후에 전범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다.

그중 하나가 1928년 6월 4일에 발생한 만주군벌 장쩌린(張作霖) 폭살사건이다. 봉천(奉天, 현재 심양(瀋陽)) 교외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가던 장쩌린은 관동군이 고용한 암살자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봉쇄하기 위해 만주군벌 장쩌린을 지원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데 비해, 만주의 관동군은 차제에 장쩌린 군벌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며 도쿄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관동군의 모의는 도쿄의 내각도 모른채 진행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가 개입되어 있었다. 고모토는 바덴바덴 맹약의 3인방이 선발한 11인 멤버중 한사람이다.

 

▲ 만주사변 때 만주 선양을 점령하는 일본 관동군 /위키피디아

 

이 사건의 진상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밝혀졌다. 중국 첩보원 진비후이(金璧輝)의 애인이자 첩보원이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가 도쿄전범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면서 당시의 상황을 폭로했다. 그는 패전후 미군측에 붙어 동료로부터 배신자라고 욕을 얻어 먹었지만, 만주사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앞서 1927년 만주철도 폭파사건도 고모토의 소행이었다. 일본 신문들은 중국 마적의 소행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일본군 사조직의 소행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11인 멤버의 또다른 한사람으로, 일본육사 16기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였다. 일본군 특무기관의 장으로 임명된 그는 장쩌린을 비롯해 만주인들과 연줄이 많았다. 그는 중국의 어떤 정치인이 매수 가능한지, 아편과 여자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첩보와 파괴활동을 지휘했다.

도이하라 이외에 관동군 고급 참모에 16기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 征四郎) 대령. 작전 참모는 21기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중령이 각각 배치됐는데, 이들도 11인 멤버였다.

1931년 3월 31일, 이시하라는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완벽한 음모를 꾸몄다. 이시하라는 관동군 막사에 9.2인치 대포 2문을 걸고 바깥에서 보이지 않게 위장막을 쳤다. 포대에는 비밀을 맹세한 포병 부대가 배치되었다. 포 하나의 목표는 장쩌린의 아들 장셰량(張學良)의 공군기지를 정조준했고, 또다른 포는 중화민국 경찰막사를 향했다.

그리고는 철도 탈선사고를 일으켰다. 그해 9월 18일 일본군은 류타오후(柳條湖)의 만주 철도를 폭파한다. 그리고는 장셰량의 짓이라고 둘러댔다. 다음날 관동군의 포대는 정확하게 장셰량의 공군과 경찰서를 폭파시켰다. 관동군은 남만주 전지역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상황은 그날 저녁에 끝나버렸다. 일본측은 두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남만주 전체를 점령했다. 일본은 도발에 응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도이하라는 이어 첩자 진비후이를 앞세워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로 데려가는데 성공했다. (도이하라와 이타가키는 후에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들은 군 내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었다. 1929년 8월 바덴바덴 맹약의 주인공 중 한 사람 오카무라 야스지 대령이 육군 보임과장에 선임됐다. 이듬해 정기인사때는 오카무라의 덕분에 바덴바덴 4명중 16기 나까다 데쓰잔 대령이 육군성 군사과장에, 17기 도조 히데키 대령이 육군 참모본부 편제동원과장에 임명됐다.

이제 일석회는 일본 군부 중앙에 포진했다. 만주사변 2개월 전인 1931년 8월엔 육군 중앙 주요과장 회의 멤버 7명 중 5명이 일석회 회원이었다. 전략 담당 군사과장, 인사과장, 민간인과 물자를 동원하는 편제동원과장,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구미과장, 교육을 담당하는 제2과장이 일석회에 장악되었다.

만주사변 6년 후 1937년 일본은 만주를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하고(중일전쟁) 이어 1941년 진주만을 기습했다.(태평양전쟁) 3총사와 11인 멤버의 학습대로 전쟁이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구상한 군국주의 일본의 최후는 1945년 8월 15일 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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