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오늘]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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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오늘]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25 11: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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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서 조선침략 원흉 사살…가묘는 있는데, 아직도 유해 못찾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태운 특별 열차가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그날 새벽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새벽에 하얼빈 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룰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를 기다렸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안중근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 뤼순 형무소내 안중근의사 추모기념관의 안중근 상 /사진=김인영

 

10월 26일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한 날이기도 하거니와, 그에 앞서 70년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기도 하다.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토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였다. 일본은 조선을 집어 삼킨후 만주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이토를 그곳에 보낸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러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 끝나는구나”며 그를 끝장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나이는 69세. 죽을 때도 되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동포신문인 「대동공보」 사장 유진률(兪鎭律)에게서 권총 3정을 얻어 우덕순, 유동하, 조도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일행은 10월 24일 유동하를 하얼빈에 남겨두고 바로 전 역인 차이자거우(蔡家溝)로 떠난다. 철로가 교차해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그곳에서 거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온다. 1차로 우덕순과 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역에서 의거를 결행하고 실패하면 2차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계획이었다.

 

▲ 뤼순(旅順) 형무소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곳 /사진=김인영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 역으로 이토를 기다렸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군의 저지로 열차에 접근하지 못해 실패한다.

9시경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 역으로 들어왔다. 안중근 의사가 쏜 3발의 총탄은 이토를 명중시켰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심장을 쏘아 뜨리며 거사에 성공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군에 체포되면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그직후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애국열사 4명은 뤼순(旅順)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결과는 뻔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했다. 그때 31세의 젊은 나이(한국나이 32세)였다.

 

▲ 뤼순 형무소내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 /사진=김인영

 

하지만 서글프게도 후손들은 순국한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묘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해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순국 당시 뤼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안 의사 사형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 의사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년 3∼4월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뼈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땅이 파헤쳐져 당초 목표로 삼았던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측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북한측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 효창공원 삼의사 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사진=김인영

 

안중근 의사의 가묘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다.

효창공원 3의사 묘소에 가면 비석이 세 개인데 무덤은 네 개다. 비석이 있는 3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다. 비석이 없는 무덤은 안중근 의사의 가묘다. 가묘(假墓)란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임시 묘라는 의미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순국한지 108년이 지났는데,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돌아오길 쓸쓸히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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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2022-12-12 10:32:49
안중근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