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 오늘] 프랑스, 독일 자르란트 뺏으려다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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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오늘] 프랑스, 독일 자르란트 뺏으려다 실패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22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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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로 독일 귀한 결정…EU 탄생의 모태

 

지금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다정하게 악수하고 유럽의 장래를 논의하지만, 2차 대전 직후엔 두나라는 원수지간이었다. 프랑스는 나치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전쟁 배상금으로 땅이든, 돈이든 받아내려 했다.

전후 프랑스가 노렸던 땅이 자르란트(Saarland)였다.

 

자르란트는 면적 2,569km²로 룩셈부르크 정도이며, 서울의 4배에 해당한다. 인구 100만명으로 독일에서 가장 작은 주다. 주는 덕일의 서남방으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에 인접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는 이 작은 주를 점령해 보호령(protectorate)으로 통치했다. 그러다 프랑스는 이 땅을 자치주로 만들어 공식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욕심을 냈다.

그러자 아무리 패전국이지만 독일 연방정부(서독)가 가만 있지 않았다. 1950년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자르란트의 반환을 촉구했다. 결국 주민투표에 붙이기로 했다.

 

▲ 자르란트

 

1955년 9월 23일 자르란트에서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프랑스령 자치주로 남을 것인지에 찬성한 표가 32.29%, 반대표가 67.71%로 나타났다. 압도적으로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자르는 독일에 복귀하게 된다.

 

자르란트는 중세에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들이 작은 영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 프랑스 왕의 직할령도 있었고, 독일계 바바리아 왕국의 영지도 있었다.

30년 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고, 루이 14세에 의해 한때 점령되기도 했다. (1680-97). 프랑스 혁명기에는 라인강 좌측 지역이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5년 파리조약에서 그 대부분이 프로이센에 넘어가고 남동부는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석탄 산지로, 산업 혁명 이후 석탄 및 철강 공업이 발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이곳을 합병하려다 실패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국제연맹이 감독하는 자치 지역으로 되었다. 그후 1935년 주민투표에서 91%의 지지로 독일로 복귀했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는 이 곳을 독일에서 분리해 통합하려다가 주민들의 거부로 실패한 것이다. 1956년 10월 프랑스와 독일(서독)은 자르란트를 독일에 귀속시키기로 협약을 맺었고, 이 당은 1957년 1월 1일 독일연방공화국의 1개 주로 편입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자르란트 분쟁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ECSC는 EEC로, 오늘날 EU로 발전하게 된다. 1차 대전때 서로 양보하지 않던 영토분쟁이 결국 또다른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성에서 유럽의 두 강대국은 서로 영토를 양보하고,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오늘날 유럽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 자르란트 위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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