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 오늘] 中共 대장정 끝내고 옌안에 거점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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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오늘] 中共 대장정 끝내고 옌안에 거점 구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21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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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군에 쫓겨 1년간 1만2,500km 후퇴…역사적으로 미화

 

중국 내륙 섬서성(陝西省) 황토고원의 옌안(延安)이란 시골 도시에 마오쩌둥(毛澤東)의 붉은 군대(홍군) 8,000여명이 1년여 후퇴를 거듭한 끝에 도착한 것은 1935년 10월이었다. 당(唐)나라 때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던 거점이었던 이 도시가 중국 공산당 혁명도시가 되었다.

섬서성에는 리우지단(劉志丹), 가오강(高崗), 쑤하이동(徐海東)이 이미 소비에트를 건설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무렵 또다른 홍군 4군단과 2군단이 연안에 합류했다.

10월 22일 마오쩌둥은 대장정의 종식을 선언한다. 3개군을 합쳐 연안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옌안은 중국 내륙지역인데다 황하(黃河)의 지류인 옌수이강(延水) 남쪽에 위치해 있어 국민당군으로부터 방어가 유리한 지역이었다.

마오의 붉은 군대는 우선 지역 군벌과 지주들로부터 무기와 재산을 약탈하고 몰수했다. 그리고 농민과 빈민으로부터 지원병을 모집했다. 중국 공산당은 1935년부터 1949년까지 이곳 연안을 거점으로 삼아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이뤄낸다.

 

▲ 중국 공산당 대정정 루트 /위키피디아

 

1934년 10월 16일부터 1935년 10월 22일까지, 1년에 걸친 중국 공산당의 후퇴 길은 대장정(大長征, long march)이라는 용어로 미화되었다. 공격의 길이 아니라 후퇴의 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뒤바꿔 선전하는 기술이 뛰어나다.

 

앞서 중국 공산당은 1927~1929년 중국 남부 정강산(井岡山) 고원 일대를 점거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어 1931년 11월에는 인구 250만 명의 장시성 루이진(瑞金) 지역에서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궈타오,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한다. 소비에트는 장시(江西)성, 푸젠(福建)성을 거점으로 이외에도 후난(湖南), 광시(廣西), 안후이(安徽)성을 위시해 양쯔강 이남 주요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루이진을 수도로 해서 각지의 해방구를 모두 합치면 그 인구가 1천만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의 진입으로 루이진이 함락된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의 잔당들은 1934년 10월 16일 집결해 17일 대규모 후퇴를 단행한다.

출발당시 인원은 10만명쯤 되었다. 그들의 후퇴 행렬은 수십리에 달했다고 한다. 각기 쌀과 생활필수품을 넣은 보따리를 막대기에 걸어 어깨에 메고, 탄약과 수류탄을 넣은 또다른 짐바구니를 들었다. 담요와 솜이 든 겨울옷가지, 면으로 된 덧신, 바늘, 실도 챙겼다. 그들은 모두 총을 소지했다.

하지만 대장정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트럭이나 우마차도 없었다. 모두 두 다리로 걸었다. 2km를 걷다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도 발에 물집이 생겨 들것에 실려갔다.

목표도 없었다. 그저 서쪽으로, 서쪽으로 국민당 군을 피해 나아갔다. 앞에 국민당군 초소가 보이면 공격해 섬멸하고, 뒤따라오는 국민당 대군을 피해 도주했다.

낙오자도 많았고, 도망자도 증가했다. 중국 윈난성은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강은 급류가 흘렀다.

1년간 이들이 건넌 산맥이 18개, 강이 17개, 걸은 거리는 1만2,500km였다. 편안한 여행길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길은 험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중간중간에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하면서 도망쳤다. 11개의 성을 지났다. 사막도 건너야 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촌락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티벳에서는 적개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공격했고, 서부 이슬람지역에선 군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쓰촨성의 늪지대에선 굶주림과 질병이 홍군을 덮쳐 쥐를 잡아먹고 대소변에서 낱알을 골라내는 6일 동안의 고생 끝에 겨우 습지를 나올 수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은 토색질을 했다. 군량이 고갈되자 현지인에게 식량을 공출했지만 저항이 심해져 도망쳐야 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연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안에는 이미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소비에트가 건설되어 있었고, 더 이상 갈데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집결했다. 마오쩌둥을 따르는 병사는 8,0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90% 이상이 도주하거나 병사하거나 전투에서 죽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한 이후 기나긴 후퇴행각을 미화하며 ‘대장정’이라고 명명했다.

마오쩌둥은 연안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장정은 진실로 선언서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 …… 12개월 동안 공중에서는 매일같이 수십 대의 비행기가 우리를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대군이 우리를 포위, 추격, 차단하였다. 우리는 장정의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장애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개의 다리만으로 2만 여리가 되는 거리를 걸어 11개의 성을 종횡단하였다. …… 전 세계를 향하여 홍군이야말로 영웅적인 군대이며,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의 주구인 장제스의 무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퇴행렬에서 저지른 일들을 미화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노정교(瀘定橋) 전투다. 노정교는 쓰촨(四川)성에 있는 400m의 현수교로, 청나라 말기에 연결되었는데, 그들은 그 다리를 건너야 했다.

홍군이 도착했을 때는 다리 건너편에는 국민당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산당은 이 전투를 이렇게 묘사한다.

“국민당군은 다리를 끊어 놓았다. 22명의 홍군 특공대가 목숨을 걸고 나무판을 놓으려 하자 국민당은 폭격과 기총소사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특공대가 수류탄을 던져 강 건너편을 제압하고 2시간 만에 다리를 보수, 홍군은 도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 군은 몇 명되지 않고 행군은 편안했다고 한다. 홍군은 먼저 지역주민을 앞세워 다리를 건너가게 해 그들이 먼저 피해를 보게 했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회고록에 따르면, 덩샤오핑도 노정교 전투가 선전용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 중국 쓰촨(四川)성의 노정교(瀘定橋). /위키피디아

 

아무리 선전용으로 과장하고 미화되었다지만,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대해 인정할 것이 있다. 그들은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중국 대륙을 집어삼켰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은 사막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면서도 끊임없이 국민당의 공격을 받았으며, 질병과 굶주림과도 싸워야만 했다. 지나가는 길목에 얼마 안되는 식량을 무지막지하게 징발했기 때문에 적대하는 농민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런 그들이 마침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린뱌오(林彪),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후에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대장정에 참여한 세대들이다. 대장정의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더라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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