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오늘] 보복 없이 예루살렘 탈환한 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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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오늘] 보복 없이 예루살렘 탈환한 살라딘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01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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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전 십자군 점령 때의 대학살극 피해…기독교 세계서도 존경

 

1187년 10월 2일,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술탄 살라딘의 군사가 예루살렘의 성주 발리앙과 협상에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3만 디나르(dinar, 고대 아랍의 통화단위)의 보석금을 받고 7,000명의 십자군 병사들을 풀어줬다. 십자군이 억류하던 3,000명의 이슬람 노예들도 석방되었다.

살라딘은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에 대해서는 보석금 없이 풀어주었다. 예루살렘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비잔틴 제국의 왕비와 예루살렘 왕국도 풀어 주면서 귀족들의 피난처까지 안전하게 호송하게 했다.

그리고는 몸값을 치르지 못한 1만5,000명은 죽이지 않고 노예로 만들었다. 이중 7,000명이 남성이었고, 8,000명이 여성과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로써 1099년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 기독교 기사단이 점령한 예루살렘은 88년만에 이슬람 군에 의해 함락된다.

 

▲ 예루살렘의 성주 발리앙이 살라딘 군에게 항복하는 모습(1490년 그림) /위키피디아

 

살라딘(Saladin)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uf ibn Ayyub)이고,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십자군 운동 당시에 그의 군대에 패해 쓴맛을 보았던 기독교인들의 발음을 따 전해오는 것이다.

살라딘은 지금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Tikrit)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이라크에는 살라딘을 기념해 티크리트를 주도로 하는 살라딘주가 있다.

살라딘은 아랍 세계에서 서러움을 받는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쿠르드족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중동 아랍세계는 교황의 요청으로 유럽의 십자군 기사단이 침공해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라아의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아랍인들은 서로 대립, 반목하고 있었다.

살라딘의 가족은 살라딘이 어릴 때 지금 이라크의 모술로 가서 이라크-시리아에서 세력을 떨치던 이맛 아딘 장기(Imad ad-Din Zengi)라는 이슬람 군주의 휘하에 들어가 고위 관료로 출세했다. 살라딘은 아버지를 따라 모술, 다마스쿠스 등지에서 성장했다.

그러던 중 살라딘은 26세 되던 1163년에 숙부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원정 6년째인 1169년 살라딘의 숙부는 카이로에 입성, 이집트 정복에 성공했지만, 곧 사망했다. 살라딘은 얼떨결에 이집트 총독이 되었다. 그는 곧이어 이집트 술탄에 올라 아이유브 왕조를 열었다. 1174년엔 시리아의 군주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의 술탄도 이어받아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는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살라딘은 이제 중동 지중해 연안에 성채를 쌓아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십자군을 몰아내는데 전력하게 된다.

 

▲ 살라딘 초상회 /위키피디아

 

그 사이에 프랑스 기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정치적 변동이 생겼다. 1185년에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가 사망하자, 그의 매제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기독교 세력 간에 내부 갈등이 증폭되었다.

살라딘은 이 틈을 노려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국가를 상대로 총공세를 펼쳤다.

1187년 7월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은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스 군대를 제압하고 기(Guy) 왕과 왕자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이어 살라딘은 아크레, 베이루트, 시돈 등 기독교 국가의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압박해 들어갔다.

9월 20일 살라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기독교인들은 88년전에 자신의 선조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벌였던 대량 학살의 전과가 복수로 돌아올까 두려움에 떨었다.

예루살렘 방어를 받고 있던 발리앙(Balian)이 이슬람 포로를 모두 죽이고, 이슬람 성지를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살라딘을 협박했다.

하지만 십자군의 입장에서 전세를 돌릴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살라딘의 군대는 다윗 탑(Tower of David)과 다마스쿠스 문(Damascus Gate)를 공략했고, 궁수들은 성벽으로 화살을 날리고, 공성기와 투석기가 연일 예루살렘 성을 공략했다. 9월 29일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고, 깨진 성벽으로 밀려오는 이슬람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기독교 병사들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않았다.

 

▲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세워진 살라딘 상 /위키피디아

 

결국 발리앙은 살라딘과 협상에 나섰고, 약간의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구하는 선에서 성을 내주기로 했다.

살라딘 군대는 군율을 엄히 갖춘 상태로 입성했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거했을 때 일어났던 살육과 파괴, 약탈을 막았다. 기독교 교회도 파괴하지 않았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은 88년전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점령 때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1099년 6월 고드프루아, 보두앵, 레몽, 보에몽 등 주로 프랑스 출신 영주들이 이끄는 십자군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했다. 한달간에 걸쳐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그해 7월 마침내 프랑크 군을 주력으로 하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때 기독교도들이 벌인 대학살은 아비규환과 다름없었다. 이슬람은 물론 유태인들도 십자군의 칼에 쓰러졌다. 이교도는 남녀노소 불문이었다. 1주일에 걸친 광란의 학살극은 끝났지만, 살아남은 몇백명의 생존자는 수만구의 시체를 치운뒤 쓰러졌다. 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라고 평가했다.

십자군이 저지른 대학살이 벌어진후 이슬람 세계에는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물리치자는 의식이 꿈틀거렸고,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 사이의 토후(에미레이트)들은 성전(지하드)을 부르짖었다.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항복한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떠나게 두었다. 88년전의 학살에 대한 보복이 되풀이되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은 유럽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단테는 ‘신곡’에서 살리딘을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가장 가벼운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시켰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 이후 예루살렘 왕국은 수도를 지금 레바논의 티레(Tyre)로 옮겨 이슬람과의 전투를 지속한다. 예루살렘을 빼앗긴 후 로마의 교황은 몇차례 십자군을 제창했지만,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 기사단이 건설한 크락 드 슈발리에(‘기사들의 성’이라는 뜻) 요새는 1271년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버텼다. 이 요새는 지금 이라크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살라딘이 다시 성도를 되찾은 후 예루살렘은 그후 800년 동안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다. 그후 예루살렘은 1917~1948년 사이에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유태교와 이슬람의 분할했고, 1967년 전쟁으로 남은 반쪽 이스라엘도 점령하고 있다.

시리아에 남아있는 크락 드 슈발리에 요새. 프랑스 기사들이 만든 이 요새는 십자군 전쟁 기간에 140년동안 한번도 함락되지 않았다.

 

▲ 살라딘의 예루살렘 입성에 앞서 퇴각 준비를 하는 초웨한 모습의 기독교도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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