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오늘] 서울수복 포화 속 문화재 지킨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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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오늘] 서울수복 포화 속 문화재 지킨 사연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2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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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공사 김용주와 美 포병 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의 역사관 덕분

 

9월 28일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6·25 전쟁 때 빼앗긴 수도 서울을 석달만에 수북한 날이다. 1950년 9월 28일 정오,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시청 옆에 있던 국회의사당에서 감격의 수도탈환 행사를 열었다.

전쟁 발발후 3일만에 서울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군은 후퇴해 낙동강을 최후방어선으로 삼아 전투를 벌였고, 9월 15일 마침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전을 벌였다.

한미 연합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김포와 부평을 점령하고, 드디어 9월 19일 행주산성 건너편 한강 남단에 도착해 도강작전을 벌였다. 한강 북쪽에는 북한군의 격렬하게 저항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수륙양용 장갑차(LVT)를 탄 한미 해병대는 9월 20일 새벽에 도강에 성공했다.

북한군은 서울에 최정예부대를 배치하고, 신촌의 안산(鞍山)을 거점으로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한미 연합군은 9월 25일 이 고지를 빼앗았다. 이제 남은 것은 서울시내다.

미군은 저항하는 북한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서울을 초토화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막강한 공군과 포병으로 적을 소탕하는 것은 좋지만, 500년 도읍지와 문화재가 파괴될 가능성이 컸다.

그때 미군의 초토화 작전을 바꿔 서울의 문화재를 지킨 이가 있었다. 한국인으론 당시 주일본전권공사였던 김용주씨(金龍周, 1905~1985)와 미국인으로 미 제7사단 31야전포병대대 소속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였다.

 

▲ 김용주 공사와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 /월간문화재사랑 2009년 11월 5일

 

문화재청이 발간한 「월간문화재사랑」(2009년 11월 5일)의 글을 통해 김용주씨와 해밀턴 제임스 딜 중위가 서울수복 초토화 작전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킨 일화를 정리한다.

 

김용주는 해방 후 1949년에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취임해 대일 선박반환 교섭사절단으로 일하면서 맥아더 사령부와 인연을 맺는다. 6·25가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김용주를 주일본전권공사로 갈 것을 지시했다. 김용주가 주일대표부 공사로 일본에 간 지 한 달여 후에 전쟁이 일어났다. 김용주씨는 김무성 의원의 부친이다.

김용주는 주일 미군 장군에게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때 미군 사이에 인천으로 상륙한다는 의견과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의견이 엇갈려 있었지만, 김용주는 인천이든 군산이든 최후 격전지는 서울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김용주는 미군의 공격 전법대로라면 적전지를 쑥밭으로 만들 것이며 그에 따라 함께 불타버릴 5백년 도읍의 문화재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김용주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9월 10일 맥아더 장군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김용주 전권공사가 약속한 시간에 맥아더의 방에 들어섰다. 맥아더는 김 공사에게 서울작전에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김 공사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도 심한 파괴를 하지 않고 “서울 탈환은 포화보다는 포위 작전으로 섬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도시는 파괴된 뒤에 새로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이고 이번 전후에는 우리 미국이 책임지고 전후복구를 하여 주겠다”고 했다. 이에 김 공사는 “우리 한민족은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과거 역사상 여러 번 이민족의 침략 전화를 입어 모두가 파괴되고 약탈당하여 남은 것이 극소한데 그나마 서울에 모두 집합되어 있어 이번 전쟁에 파괴되면 영구히 민족문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하한 신도시가 되어도 이것에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동정하여 특히 고려하여 주기바랍니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맥아더 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학키 참모장에게 “대단히 뜻있는 이야기니 잘 검토해 보라”고 지시를 했다.

 

▲ 미 해병이 서울 탈환작전을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김용주 공사는 문화재청이 발간하는 「월간문화재」 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힉키 중장과 참모 일행이 나를 딴방으로 안내하였다. 넓은 홀인데 벽 전체가 한국지도로 메워진 작전상황실이었다. 힉키 장군이 서울시지도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나에게 파괴해서는 아니 될 곳을 색연필로 표를 그리라 하였다.

처음에는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몇 곳에 붉은 표를 하다가 생각하니 현대전은 소각폭격인데 이렇게 점을 쳐보았자 이웃이 타서 연소되면 그만이란 생각이 나서 색연필을 중지하고 한참 있다가 정동에서 남대문, 퇴계로에 붉은 큰 선을 긋고 이 선 이남은 일본인이 새로 만든 신시가이고 이북은 구시가이니 이 선 이북은 보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참모들은 곧 서울에 이르는 도로를 동서남북으로 찾아서 표시하더니 이렇게는 도저히 불가능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선을 줄여 정동, 을지로, 왕십리선을 그었다. 참모들은 절대 보장은 못하겠으나 정동에서 청계천을 그어 이 정도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하였다. 나는 금지선 이남이나 남대문과 덕수궁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 이 두 곳은 절대 보전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김용주,「서울 폭격과 문화재 수호」, 『월간문화재』, 1972년 3월호)

 

작전회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맥아더는 김용주의 등을 두드리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서울을 탈환할 때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500년 도읍의 고궁과 궁궐은 다행히 그 피해가 적었다. 특히 덕수궁의 보호는 수도 서울 탈환의 작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용주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레디씨는 김 공사에게 “귀하는 서울을 포화로부터 구한 은인”이라고 했다고 한다.

 

▲ 행주산성 입구 좌측 언덕에 서있는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사진=김인영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후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 도하작전에 성공했다. 서울에 남아있던 적들은 치열한 항공공격, 지상포화에도 건물 등을 은폐물로 사용해 곳곳에서 저항했다.

연합군은 한강을 건넌 후 덕수궁 탈환을 목전에 두었다. 당시 덕수궁에는 수백 명의 적군이 궁전 건물과 정원에 집결해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장비를 일순간에 괴멸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포격개시’란 말 한 마디면 몇 분 안에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불바다가 될 위기에 처했다.

미 제7사단 31야전포병대대 소속 제임스 해밀턴 딜 당시 중위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 포격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심한 그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해 덕수궁을 살리는데 최대한 노력을 하기로 했다. 즉 적들이 덕수궁을 빠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적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공격을 해오면 아군의 사상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 서울 수복 과정에서 연합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북한군을 생포, 이동시키고 있다. /위키피디아

 

1950년 9월 25일자 제임스 해밀턴 딜(1998년 작고)의 일기를 들어보자.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측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군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격지휘 소대를 불러내 포격 개시를 지시하였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폭파 위기의 덕수궁」, 국방군사연구소, 1996)

 

그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최선의 방안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이후 서울시내는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다. 서울시청의 경우에는 건물에 숨어있던 적이 발악적인 사격을 가해 수류탄이 터지고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지만 가까이 있는 덕수궁에는 별다른 포격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덕수궁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보존되기까지에는 이 같은 문화재 수호자들의 식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제임스 해밀턴 딜은 “옛 왕궁을 보존하는 것은 그 옛날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에 맞는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우리 정부는 해밀턴 딜 중위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서울수복 기념일을 맞아 우리 문화재 보호에 앞장 선 김용주 공사의 노력과 미국인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의 역사관을 기억해두자.

 

▲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기념행사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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