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오늘] 인도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최후
상태바
[9/19 오늘] 인도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최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8 14: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칸고원의 왕국, 영국과 파키스탄에 버림받고 인도군 침공으로 멸망

 

인도 남부 데칸고원에 하이데라바드(Hyderabad)라는 독립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은 니잠-울-물크(Nizam-ul-Mulk)라는 귀족이 인도의 마지막 왕국인 무굴제국 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1724년 데칸고원으로 건너와 세운 나라다. 무굴 제국도 이 나라를 제후국으로 인정했다. 중국식 통치방식으로는 번국(藩國)이다.

이 나라는 무굴 제국이 멸망하고,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도 영국 왕을 통치자로 모시는 자치국(princely state)으로 살아 남았다. 이슬람 교도인 아사프 자히(Asaf Jahi) 왕조는 7대를 이어 가며 힌두교도인 하이데라바드 국민을 통치했다.

왕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고, 영국이 전쟁으로 어려울 때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에게는 보호국 중에서 든든한 우방이었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멸망당시 인구 1,600만명, 면적 21.4만㎢로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넓었다.

문제는 인도가 독립하면서 불거졌다. 1947년 8월 15일 영국 의회는 인도 독립안(Indian Independence Act 1947)을 가결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에게 동인도 회사의 주권을 넘겨주겠다고 발표했다. 인도인들에게는 기뻐서 날뛴 일이었지만, 영국령 인도 내 독립국들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영국은 자기 나라를 도와준 자치 왕국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 없이 내팽개친 것이다.

 

▲ 하이데라바드 왕국(짙은 녹색)과 니잠의 속국(옅은 녹색) /위키피디아

 

영국군이 철수할 시기에 인도(파키스탄 포함)에 555개의 자치국이 있었다. 자치국은 인도대륙 면적의 48%를 차지했고, 인구의 28%에 해당했다.

그중에서 하이데라바드가 가장 크고 부유했다. 2만4,000명의 자체 군대를 보유했고, 예산을 따로 운영했으며, 철도와 통신, 우체국등 공공서비스를 갖추고 있었다. 국내에 라디오 방송과 항공사도 운영하고 있었다. 1937년 미국의 타임지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Nizam, 국왕)을 세계 최고 갑부로 소개하기도 했다. 194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식에 니잠은 다이어먼드가 박힌 왕관과 목걸이를 소개해 화제가 되었다.

 

1947년초,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공식적으로 독립하기 이전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헌의회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왕국과 토후국 들이 종교와 지리적 위치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합병을 선언했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통치자 미르 오스만 알리 칸(Mir Osman Ali Khan)은 고민에 빠졌다. 왕족은 이슬람이고, 국민들 대다수는 힌두교를 믿었다. 왕족 입장에서 파키스탄에 붙어야 하지만, 지리적으로 인도에 포위되어 있었다.

왕국은 일단 파키스탄에 손을 내밀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동벵골 지역은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합병을 인정했지만, 데칸 고원 중부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파키스탄의 본토와 상당히 떨어져 있고 힌두교도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렇다고 힌두교도가 중심인 인도와는 합병을 할수 없었다. 결국 독립을 선택한 것이다.

 

▲ 하이데라바드 왕국 최후의 국왕(니잠) 미르 오스만 알리 칸 /위키피디아

 

1947년 6월 11일, 하이데라바드의 니잠(Nizam)이 선수를 쳤다. 국왕은 인도와 파키스탄 어느쪽 제헌의회에도 참여치 않고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이데라바드는 일단 인도와 파키스탄과 체결한 스탠드스틸 조약을 준수키로 했다. 스탠드스틸조약(standstill agreement)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영국, 그리고 수많은 소왕국들이 맺은 것으로, 1년 동안 영국 통치 하의 권력구조를 유지하되, 외교권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갖기로 합의한 현상유지 조약이다. 일종의 휴전 조약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약정한 휴전 1년 동안에 건국 준비에 공을 들였다. 이 기간에 수많은 제후국들이 인도 또는 피키스탄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엔 정규군 이외의 별도의 무장군이 출현했다. 국왕(니잠)을 지지하는 라자카르(Razakars)라는 이슬람 사병조직이 만들어져 인도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 사병 조직은 정규군의 수와 맞먹는 2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사단이 벌어졌다. 하이데라바드가 파키스탄에 1,500만 파운드나 되는 거액의 자금을 빌려준 사실이 인도에 알려졌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돈은 파키스탄의 군비 확대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하이데라바드 정부가 왕국을 통과하는 인도 화물을 제지하고, 인근 봄베이주등을 부추기는 움직임도 인도 정부에 포착되었다.

막 독립한 인도 정부 지도부에 강경파들이 등장했다. 인도의 동쪽과 서쪽의 파키스탄과 내부의 하이데라바드가 동시에 전쟁을 벌인다면, 인도는 곤경에 빠질 것이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인도 독립의 지도자 자와할랄 네루의 생각도 하이데라바드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대화와 타협을 선택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세상이 바뀌면 입장도 바뀐다. 제국주의 영국에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도 독립세력들이 이젠 과거 영국 영역의 소왕국이 독립하려는 것을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

 

▲ 하이데라바드의 이슬람 사명 라자카르의 훈련모습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는 4만명의 군대가 있다고는 하지만, 훈련받고 무장한 병력은 6,000명에 불과했다. 싸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외교적 노력에 최선을 다했다.

먼저 영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선택하라고만 할뿐, 한 때의 우방국을 저버렸다. 유일하게 하이데라바드의 독립을 지지한 영국인은 2차 대전 막바지에 총리를 맡았다가 전후에 실각한 윈스턴 처칠 등 보수세력 뿐이었다. 미국을 찾아갔지만, 유엔 안보리를 찾아갔지만, 소용없었다.

 

1년간의 휴전기간이 끝났다. 먼저 공격한 것은 하이데라바드의 사병조직 라자카르였다. 1948년 9월 6일 라자카르의 한 부대가 인도군 초소를 공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13일 3만5,000명의 인도군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데라바드로 침공했다. 작전명은 폴로 작전(Operation Polo)이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9월 18일 오후 4시 하이데라바드의 총사령관이 인도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인도군 사망자 32명, 하이데라바드 정규군 사망자 807명, 사병조작 라자카르 사망자 1,373명이고, 부상자는 수천명에 이르렀다.

다음날인 9월 19일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인도 정부에 강제 병합되었다. 인도 최대이자, 최후의 번왕국은 이렇게 소멸했다. 폴로 작전 이후 왕실을 제외한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은 파키스탄으로 망명한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건국 224년만에, 7대에서 끝을 맺었다.

 

▲ 1948년 9월 18일 하이대라바드군 사령관(오른쪽)이 인도군 사령관에게 항복을 제의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인도는 1949년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영토를 인도 연방에 가입시켰고 1950년 하이데라바드 주로 격하했다. 1956년 안드라프라데시 주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왕국의 이름은 고작 주도 하이데라바드에만 남겨 놓았다.

2014년 인도 정부는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북서부에 텔루구어 사용 지역을 텔랑가나 주로 분리 신설했다. 하이데라바드시는 행정상 텔랑가나 주와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공동 주도를 겸하고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