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 오늘] 문화혁명 불질러 놓고 숙청된 린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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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 오늘] 문화혁명 불질러 놓고 숙청된 린뱌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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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복권시켜 주고 홍위병 지지…1인자 되려다 실패

 

1971년 9월 13일 붉은 중국의 제2인자 린뱌오(林彪)는 가족과 함께 소련 이르쿠츠크로 망명하려고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도중에 몽골 지역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아직까지 린뱌오의 사망에 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설명은 항공기 연료 부족이다.

▲ 린뱌오(林彪) /위키피디아

린뱌오의 비극은 2인자가 1인자를 넘어서려 한 것에서 비롯된다. 18살에 공산당에 입당해 대장정에 참가한 원조 중국 공산당원으로, 그는 실각한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해 그에게 다시 실권을 쥐어준 장본인이다.

중국 인민군을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의 지지를 얻어 마오쩌둥이 다시 중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일으킨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1966년 시작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장칭(江靑)등 4인방이 몰락하는 1976년까지 10년에 걸쳐 전개됐다. 그래서 ‘10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도 한다.

광기의 시대였다. 대중이 얼마나 광기에 빠지고 사회와 나라를 혼란의 나락으로 추락시킬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천하의 광란은 마오쩌둥의 정권욕에서 출발한다.

1959년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 이어 류샤오치(劉少奇)가 국가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이 당총서기를 맡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총리직을 유지했다.

권력을 장악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방식에 의심을 품었다. 마오는 홍(紅:대중의 혁명의식, 즉 마오주의)을 강조하고 전(專:실용적 전문지식)을 경시했다. 마오가 중국 대중을 동원해 정신적 이념에 소모하도록 했고, 실효성이 없는 인민공사를 강조하면서 경제를 침체에 빠뜨렸다는 게 신집권층의 실용주의적 노선이었다. 인민의 궁핍함을 본 류사오치는 집단농업방식인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민 개인의 사유화를 일부 인정하는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 했다. 인민공사는 마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실권에서 손을 떼고 상징적인 당주석직만 보유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뜻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사후에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상이 침투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마오는 후계자로 지정해둔 류사오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두 파벌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다.

 

▲ 홍위병 /위키피디아

 

1966년 5월 16일, 마오의 주재 하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5·16 통지)를 발표하고, 베이징시를 장악하고 있던 펑전 등 실권파에 대해 "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교시와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틀후인 5월 18일 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정치인의 만 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나서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홍위병 창설을 선동한 것이다.

마오쩌둥 세력의 타깃이 된 류사오치는 이념보다 실용(專)을 중시했고,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지지하던 지식인들을 타깃으로 했다.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됐다.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조반파는 어린이들에게 마오를 부모 이상으로 떠받들도록 세뇌했다.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어린이들은 집에 와서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주장했고, 지식인들은 자녀들로부터 배척당해야 했다.

주로 중, 고등학교, 대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해야 한다면서, 그 일환으로 어린 학생들이 교사나 교수들을 구타하거나 공개적으로 수모를 주었다. 사회가 미쳐 돌아갔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손자가 할아버지를 타파 대상으로 고발해 처형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어느 과학연구소에는 갑자기 노동자, 농민들이 쳐들어와 접수했다. 연구원들은 매일 정신교육과 자아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남자 연구원들은 건설현장으로 보내져 벽돌을 나르고 쌓은 노동을 하고, 여성 연구원은 마을에서 이발 일을 해야 했다.

이른바 하방(下放)운동이다. 당·정부·군간부·지식인·학생들의 관료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해 농촌이나 공장에서 노동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했다. 군간부들은 사병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기거해야 했다. 중공(中共)이 수립된지 10여 년이 흐르는 사이 중앙 간부들에게서 안일함이 나타났고, 이를 타파하기 마오쩌둥이 하방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던 한 연구소 연구원장은 정신개조를 해야 할 정도가 너무 커 썩은 냄새가 펄펄 나는 재래식 변소의 청소를 하고, 심하게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 심한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중국 전역에서 인간관계가 무섭게 변했다. 친구 사이, 동창, 부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관점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고발했다.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 광풍의 배경에는 국방부장 린뱌오가 버텨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민해방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하지만 마오가 권력에서 밀려나자 군부를 틀어쥐고 있던 린뱌오에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린뱌오의 인민해방군은 마오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통해 당을 공격했다. 당이 무력해 졌다. 마오는 린뱌오의 지지에 힘입어 홍(紅)의 정책, 즉 문화대혁명을 밀어부쳤다.

덕분에 류샤오치가 퇴진하고 린뱌오가 마오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명의를 이용해 권력을 크게 확대했다. 린뱌오는 문혁 발발 2년후인 1968년에 중국 지도부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마오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자 린뱌오는 2인자 자리도 모자라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탐했다. 마오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린뱌오는 후계자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하기 위해 류사오치 실각으로 빈 국가주석 직을 달라고 했다. 마오는 이를 거부했다. 린랴오는 쿠데타를 준비했다. 하지만 노회한 마오는 이를 알아차리고 린뱌오 주변을 단속했다.

린뱌오는 1971년 비명횡사했지만, 그가 불지른 문화혁명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죽음과 부인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몰락으로 종언을 고했다. 1976년 9월 9일 다년간 파킨슨 병을 앓고 있던 마오쩌둥이 83세의 나이로 숨졌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華國鋒)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는 쪽지를 남기고 후계자로 삼았다. 화궈펑은 덩샤오핑과 연대했다.

문화혁명을 이끌고 있던 4인방이 정변을 꾀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화궈펑과 덩샤오핑, 군부는 재빨리 4인방을 체포했다. 4인방은 숙청되고, 드디어 10억 중국인을 어지럽힌 10년 대동란은 끝나고 말았다.

 

▲ 주자파로 몰린 반체제 인사들이 대중들 앞에 서 있다. /위키피디아

 

이 10년 사이에 중국 전역에 걸쳐 3만4,800명이 사망하고, 72만9,511명이 박해받았다는 게 공식 통계다.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라오서(老舍)는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귀가한뒤 이튿날 시체로 발견됐고, 1911년 신해혁명 초기부터 참가한 철학자 슝스리(熊十力)는 박해를 받던 도중에 사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를 작사한 톈한(田汉)은 우파 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당했고,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리리싼(李立三)은 심판 비판을 받아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주구라는 뜻의 ‘주자파’(走資派) 또는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 강간, 심문, 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목숨을 건졌으나, 신체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다. 지금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문화혁명 때 농촌으로 쫒겨난뒤 갖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땐 삶과 죽음의 교차에 놓여 있었다.

조반파의 전위대인 홍위병은 부모 세대와 교사들의 타락과 부패, 비리행위를 캐내고, 기존 권위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홍위병들은 각 가정에서 공예품을 탈취하거나 파괴했다.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이 기간에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공자의 흉상이 부서지고, 유교 서적이 불태워졌다. 티베트에서만 6,000여개의 사찰이 파괴되고, 위구르 무슬림들이 무참히 학살됐다..

경제는 정지했다. 공업과 농업 생산은 후퇴했고, 교육제도 마비로 인해 국가는 훈련을 받을 인원을 모두 잃었다. 젊은 세대만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중년과 노년의 학자, 과학자들도 농촌으로 보내져 수년간 연구를 하지 못한채 똥지게를 져야 했다.

 

광란의 10년을 보낸후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취하며 중국은 문화혁명의 악귀에서 해방되고 주자파로 몰렸던 실용주의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경제건설을 도모하게 된다. 홍(紅)과 전(專)의 지리한 싸움에서 결국 전(專)이 이긴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애써 문화대혁명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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