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오늘] 불타는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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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오늘] 불타는 예루살렘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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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규환의 지옥, 유대 제2성전 불타고 도시는 파괴돼

 

“굶주림이 여인의 인성을 갉아먹었고, 분노의 불길은 굶주림보다도 더 거세게 여인을 몰아세웠다. 분노와 궁핍에 몰린 여인은 자연에 어긋나는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젖먹이 아기를 붙잡고 여인은 외쳤다.

“불쌍한 아가야, 전쟁과 기아로 가득한 이 세상에 너를 살려둬서 뭘 하겠니? 로마군이 들어올 때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어차피 노예가 되기도 전에 굶주림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폭도들은 로마군이나 굶주림보다도 더 잔인하구나. 자 아가야, 내 식량이 되거라. 그래서 반도들에게 분노의 복수가 되고, 유대인의 처참한 수난을 완결짓는 공포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 남기거라.”

 

유대 민족주의자로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로마에 투항한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저서 「유대전쟁사」에서 이렇게 썼다.

▲ 티투스 흉상 /위키피디아

서기 70년 로마는 2월부터 9월 8일까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6개월 이상 로마군에 포위된 예루살람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고 있었고 말로 표현할수 없는 고생을 했다. 어느 집에서나 음식냄새가 조금만 나도 싸움이 벌어져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이 변변찮은 먹을거리를 뺏고 빼앗기면서 주먹다짐을 벌이기 일쑤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마리아라는 여인이 굶주림에 지쳐 자신의 아기를 잡아먹는 해괴한 이야기를 요세푸스는 기록했다.

9월 8일 로마 장군 티투스(Titus)가 이끄는 3개 군단은 6개월간의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제2성전은 불타고, 그 안의 성물들은 철저히 약탈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전쟁 전기간에 9만7,000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로마에 세워져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간 메노라(7개 춧불 성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 불타는 예루살렘 (David Roberts, 1850) /위키피디아

 

전쟁은 4년전에 시작되었다. 서기 66년, 유대 지역은 로마의 속주였다. 로마는 각민족의 고유종교와 자치를 허용했기에 유대인들도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생활을 하며 자치를 허용받았다.

서기 66년 유대의 한 시나고그에서 그리스인들이 제사를 지내자 유대인들과 충돌이 빚어졌다. 유대교의 배타성이 빚어낸 종교 충돌이 민족갈등으로 번져나갔다. 극렬 유대교도이자 민족주의자인 열심당원들이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로마군을 급습하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에 유대지역을 관할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였고, 이중삼중의 성벽과 높은 탑,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채도시였다.

케스티우스는 예루살렘 공략에 실패하고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로 돌아와 병으로 죽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반란을 진압케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 6만여 병력을 동원해 다시 예루살렘 공성전을 벌였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를 전투에 참여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곧이어 로마 황제로 받들어져 그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 전선의 책임자로 남게 된다.

예루살렘 안에서는 열심당(熱心黨)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결사항전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며, 열심당을 주축으로 하는 강경파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사살했다. 수많은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열심당원들은 도시 안에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다. 수많은 도시인들과 군인들이 굶어죽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아비규환의 장면은 바로 이 대목에서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도시를 탈출하려는 자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다.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 로마 티투스 개선문에 그려진 그림. 유대 성전에서 빼앗은 메노라(7개 촛불)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인들은 남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자들의 신앙 대상을 철저히 파괴했다. 로마군은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벽도 무너뜨렸다.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 km 지점의 마사다 요새에 급진파들이 항전을 계속했다. 예루살렘 함락 3년후인 서기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유대인들은 전원 자살함으로써 요새는 함락되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로마는 더 이상 유대교에 대해 관용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는 각지에 노예로 보냈고, 대재사장 제도도 폐지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 1개 군단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물려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 신전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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