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오늘]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 명분 삼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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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오늘]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 명분 삼은 일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31 1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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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6천여명 피살…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가 원흉, 자경단이 앞잡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일본 도쿄에서 아주 가까운 가나가와현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은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는 50년만에 한번씩 터지는 초대형 지진으로, 4~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때마침 점심 식사 준비를 하던 시간이어서 연료가 넘어지면서 나무집들에 불이 붙었다. 곧바로 대화재로 이어졌다.

지진과 화마로 도쿄에서 요코하마, 지바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14만명이 사망하고, 3만 7,000명이 실종되었다. 11만채의 건물이 전파되고, 10만여채는 반파되었다. 도쿄 아사쿠사 공원에 엤던 료운카쿠(凌雲閣)라는 당대의 명물 건축물도 붕괴되었다.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이 동진하며 시베리아에 파병되었던 일본군이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한 직후였다. 일본에선 공산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반공을 외치던 군국주의자들이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관동대지진때 요코하마 모습 /위키피디아

 

갑작스런 지진으로 민심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우중충한 민심을 역이용한 자가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라는 인물이다. 이 인간은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발령받아 조선의 독립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 자는 조선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곤욕을 치렀고, 조선인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 미즈노 렌타로 /위키피디아

이 자는 그날밤 도쿄 시내를 돌아본 뒤, 다음날(2일) 도쿄와 가나가와현의 각 경찰서와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그 소문을 경찰서가 진상을 보고하게 했다.

이 자는 ‘조선인 폭동’의 전문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케 했다.

그 전문은 이렇다.

“도쿄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 등 불령(不逞)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현재 도쿄시내에는 폭탄을 가지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도쿄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했으므로, 각지에서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주기 바란다.”

이 전문은 조선총독부와 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되었다. 2일 일본 정부는 긴급칙령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5일에는 계엄사령부는 ‘조선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조치를 극비리에 결정했다. 내용인즉,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하여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풍설을 철저히 조사하여 이를 사실화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해외에는 특히 적화(赤化)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데 노력할 것” 등이다.

 

▲ 일본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창으로 살해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일본어판)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진행되었다. 일본 우파세력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으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했다. 그 자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 옷을 입어 신분을 숨기려 했다. 잔학한 그 자들은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를 읽으라고 해 발음이 이상하면 살해했다.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 류큐(오키나와)인, 대만인들도 살해당했다.

심지어 경찰서나 유치장으로 피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 「박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자진해서 유치장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일부는 유치장 안으로 쳐들어와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각지에서 6,661명의 조선인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정부는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

일본정부는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했다. 그들은 군인들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모두 자경단으로 돌렸다. 일부 자경단원은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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