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오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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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오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6 17: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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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러시아의 동부국경 협약…조선군도 두차례 나선정벌 투입

 

1689년 8월, 러시아가 건설한 동시베리아 요새도시 네르친스크(Nerchinsk)에 중국 청(淸)나라 대표와 러시아 대표가 마주 않아 국경협상을 벌였다. 통역은 라틴어로 이뤄졌다. 협상은 보름간 진행되었다.

8월 27일 양측 대표는 동시베리아와 북만주의 국경에 관한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이다. 중국어로는 尼布楚條約이라 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동부지역 국경은 헤이룽(黑龍, 아무르)강의 지류인 아르군강과 케르비치강, 외싱안링(外興安嶺,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다.

이 조약은 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놓고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국경조약이다. 또 중국과 러시아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중국은 조선이나, 베트남, 몽골을 번국(藩國)이라며 종속국으로 취급했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동등한 나라로 대우한 것이다.

 

▲ 청과 러시아의 국경 변동.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아이훈 조약(1858년), 북경조약(1860년).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1598년 징기스칸의 후예 시비리 한국(汗國)을 멸망시킨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시비리 한국의 동부 지역을 시베리아(Siberia)라 불렀다.

러시아의 17세기는 시베리아 진출기였다.

러시아는 1605년에 시베리아 중부에 톰스크를 건설하고, 1606년에는 몽골에서 북극해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을 발견했다. 이어 1632년에 동시베리아의 레나 강변에 야쿠츠크를 건설해 동북부 총사령부로 삼았다. 코사크 부대는 1639년 태평양에 다다랐고, 1648년 또다른 코사크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그동안 러시아가 부딛친 종족은 추운 시베리아에 산재해 있던 소수 민족이었고, 그들은 인구나 무기도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정복이 쉬웠다.

동쪽으로 진행하던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단은 이제 보다 따뜻하고 사람이 많이 사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시베리아 남쪽에는 중국과 몽골이 버티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제 한족의 명나라가 쇠약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흥하던 시기였다.

러시아 코사크 개척단이 시베리아 동쪽끝 태평양에 도달할 때, 조선은 병자호란(1636~1637년)에 패배해 청에 굴복한 직후였다. 만주족이 한족의 명나라를 침공할 무렵에 러시아도 시베리아 북쪽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1651년 러시아는 본국에서 병력을 증원해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의 다우르족을 공격했다. 청나라 군대 소수병력이 지원했으나 다우르족은 패배했다. 이때 러시아는 전초기지로 알바진(Albazin, 索伦汗国) 요새를 세웠다. 이듬해 네르친스크 요새가 건설되어 개척자들이 속속 정착했다. 청나라는 러시아의 알바진 요새 건설에 긴장했지만, 이 무렵 이자성 군대와 명나라 잔여 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중이어서 무력으로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으니, 제1차 나선 정벌이다. 나선(羅禪)은 러시아를 지칭한다.

청은 조총을 사용하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했다. 1654년 효종임금은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모란강(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寧古塔, 寧安)에 이르러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해 북상하다가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중류)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했다. 조선군은 7일간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고 돌아왔다..

이어 1655년 코마르 공방전, 1657년 사르호디 전투, 1658년 조선의 제2차 나선정벌을 거치면서 양측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청나라는 중원을 제압한 1660년 이후 북만주에서도 우세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삼계(吳三桂)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1673~1681년)이 터지면서 청나라는 다시 북방 경계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 강희제는 눈을 북으로 돌렸다.

강희제는 알바진과 네르친스크 지역의 부족장 간티무르를 송환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했다.

 

▲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파괴된 알바진 요새 그림 /위키피디아

 

1685년, 강희제는 군대를 보내 알바진 요새를 함락시켰다. 강희제는 항복한 러시아인들이 네르친스크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들은 얼마 후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알바진을 탈환했다. 재개된 전투는 10개월을 끌었다. 알바진 요새의 러시아군은 병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텼다. 청군은 일단 후퇴했다.

이때 청과 러시아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청에 복속한 몽골에 내분이 벌어졌고,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베네치아와 손잡고 러시아 남부 크림 반도를 둘러싸고 투르크와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청과 러시아는 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타협을 벌이는 게 낫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중국은 오랑캐와의 협상이므로 베이징에서 하자고 했지만, 러시아는 접경지대인 네르친스크에서 하자고 했다. 협상장소 선정에는 청이 밀렸다.

국경선을 긋는 협상에서 양측은 팽팽히 대립했다. 청은 황제가 몽골 칸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징기스칸의 영토가 모두 자기네 것이라 주장했고, 러시아는 그동안 개척한 요새를 내어 줄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러시아는 전투때보다 더 많은 1만5,000여명의 병력을 회담장에 투입했다. 청나라도 뒤질세라 회담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러시아측이 한발 양보하면서 타협이 이뤄졌다.

조약 내용 중 재미있는 조항은 서로 뺏고 뺏기던 알바진 요새를 폭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 라틴어로 된 네르친스크 조약문 /위키피디아

 

이때가지만 해도 청나라는 한참 기운이 올라갈 때였기에, 유럽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와 대등한 협상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후 청나라의 기력이 쇠하면서 170년 후인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을 빼앗기고, 2년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마저 빼앗겨 버렸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은 이때 그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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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순 2020-12-09 15:23:14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