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 오늘] 노래혁명으로 에스토니아 독립
상태바
[8/20 오늘] 노래혁명으로 에스토니아 독립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19 1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오와 보복 대신에 희망을 노래하며 소련에서 독립 쟁취

 

대부분의 혁명은 증오를 기반으로 한다. 증오는 보복을 부른다. 살인과 방화, 그리고 극단으로 치달은 증오는 반혁명을 불러일으켜 전쟁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희망을 노래하며 독립을 얻은 나라가 있다. 발트 3국의 에스토니아다. 에스토니아인들의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은 1991년 8월 20일 소련의 쿠데타를 저지하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국민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에스토니아에서는 유서깊은 노래 축제를 매년 열어왔다. 이 잔치에는 전국의 에스토니아인은 물론 이웃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참여하고, 해외동포들도 찾아와 1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였다.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에서 시작된 축제는 민속의상을 입고 민요와 합창곡을 부르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 에스토니아의 노래축제 /위키피디아

 

에스토니아는 중세 이후 독일,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다.

1219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에 진출해 덴마크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탈린(Tallinn)을 건설하고 일대를 장악했다. 이어 1227년 사렘마(Saaremma)섬 전투에서 에스토이나인들이 독일-덴마크 연합 세력에 완패함에 따라 북부는 덴마크, 여타 지역은 독일 주교단과 기사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그후 덴마크가 에스토아인들의 봉기에 진절머리를 내며 북부 지역을 독일에 넘겨줌으로써 16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식민지로 남아있었다.

1558~1583 리보니아 전쟁으로 에스토니아 중동부는 덴마크에, 북부는 스웨덴에, 남부는 폴란드에 분할 지배되었다. 그후 스웨덴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18세기초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710년 발트해에 항구를 얻기 위해 러시아 피오트르(Peter) 대제가 전쟁을 일으켜 합병한다.

1918년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독립을 하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1939년 독소 협정으로 다시 소련 땅이 되어 16번째 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2차 대전이 터지고 1941년 6월 독일에 점령되어 5,000명 이상이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터가 되어 산업의 45%, 철도의 40%가 파괴되고, 20만여 명이 희생되는 손실을 입었다.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수도 탈린 주거지의 약 30%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후 1944년 9월 다시 소련에 점령되어 연방에 편입되었다.

 

이 슬픈 운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래로 상처를 달랬다. 1985년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노래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소련의 탄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들은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했다.

독립운동의 발단은 1987년 2월 에스토니아의 한 지방에 소련 정부가 인광석을 발굴하려는 계획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 계획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MRP-AEG그룹이라는 단체가 소련의 계획을 공개하고 비난했다.

이 무렵 알로 마티센(Alo Mattiisen)이라는 음악가는 다섯곡의 애국 노래를 작곡해 1988년 5월 타르투 민속음악제에 내놓았다. 그해 6월 탈린에서 열린 노래 축제가 끝난후 참가자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독립 열기를 뿜어 냈다. 이 노래는 에스토니아는 물론 이웃 발트 국가에 퍼져나갔다.

1989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 이르는 600㎞의 길에 약 200만 명이 거대한 인간띠를 형성했다. 발트 3국인들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쳤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록되었다.

 

▲ 1989년 8월 23일 발트 3국의 인간 띠잇기 운동 /위키피디아

 

에스토니아 민중의 노래 부르기와 인간띠 잇기 운동에 힘입어 1991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의회)는 독립을 요구했다. 노래혁명은 다양한 시위와 저항운동으로 4년 동안 지속되었다.

1991년에 소련군 탱크가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밀고 들어가려 할 때, 에스토니아 의회는 독립을 요구하며 소련 법률을 거부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인간방패를 형성하며 방송국을 둘러쌌다. 소련 탱크는 더 이상 에스토니아를 진입하지 못했다.

1991년 8월 20일 저녁 늦은 시각, 에스토니아의 정당들은 협의를 거쳐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군은 TV 방송탑을 포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의 저항을 이겨낼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련내 강경파들의 강경진입 시도는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보리스 옐친의 민주회 사위로 인해 좌절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91년 8월 20일, 라트비아는 다음날인 21일, 리투아니아는 9월 6일 각각 독립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