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8월 9일] 그 뜨거웠던 여름날의 YH사건
상태바
[역사속 8월 9일] 그 뜨거웠던 여름날의 YH사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08 1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속성장 이면의 노동자 투쟁…유신독재 종말의 도화선

 

“그 전날 밤부터 날씨는 무척 더웠다. 마포 네거리에 있는 신민당사는 더 뜨거웠다. 저임금과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며 진입한 YH사 여공 180여 명이 4층 강당에서 일주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고 당직자 사무실이 있는 2~3층은 기자들과 당원들로 북적였으며 당사 밖에는 경찰병력이 포진하고 있어 긴장감 속에 더위를 느낄 틈도 없었다.

여공들이 야당 당사에 진입, 농성을 벌이자 당국은 도시산업선교회가 이들을 부추겨 결행했다며 야당은 무조건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뜻밖에 큰 짐을 지게 된 김영삼 총재는 당직자들과 수시로 대책회의를 갖고 안전귀가, 적정 및 체불 임금 지급, 폐쇄한 YH사 재가동과 함께 사장의 처벌을 요구했다. YH여공 사건으로 정국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관훈저널 2008년 가을호에 ‘언론 생활 45년’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내용이다. 이 글의 상황은 유신정권 막바지이던 1979년 8월 9~11일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해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당사에서 벌이던 농성시위를 벌이던 모습이다.

1966년에 창업자 장용호가 자신의 이니셜을 따 YH무역이라는 가발제조회사를 설립했다. 1970년대 초 수출 순위 15위로 우리나라 최대의 가발수출업체로 부상했다. 하지만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 둔화, 업주의 자금 유용, 무리한 기업 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고, 1975년 노동조합이 설립돼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이자 1979년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사장 장용호는 회사의 재산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에 노동조합은 회사 정상화 방안을 채택하고 회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회사와 정부 당국이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자 4월 13일부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YH무역 노동자들은 회사 측이 무더운 여름에 기숙사의 물과 전기 공급을 끊자 농성장을 옮기기로 했다.

 

▲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1979년 8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8월 9일 YH무역 노동자 172명이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마포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정부 부처에 고용 승계와 전직. 회사 정상화 등 대안을 타진했으나 어느 부처도 듣지 않았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 이틀 밤을 맞는 10일 밤 10시 40분께 여공들에게 경찰이 강제 해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날인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1,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해 20여분 만에 강제해산시켰다.

당시 정치부 기자로 신민당사에서 취재했던 이성춘씨는 진압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쳐들어온다”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창밖을 내려다보니 이게 무슨 중세시대의 성(城) 공략전인가. 긴 사다리로 경찰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었다. 4층에서는 여공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여기서 모두 죽자” “모두 모여라” “조별로 모여라” “야!” “엄마 나 죽어” 하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사무처 요원들이 각방을 두드리며 “2층 총재실로 모여라”고 소리쳐 국회의원, 당직자, 기자들이 2층 총재실로 가 책상을 쌓아놓고 김영삼 총재는 맨 뒤 벽쪽에, 다음에 국회의원 5~6명, 다음에 기자들, 그리고 외곽에 당직자와 당원들이 겹겹이 앉았다. 그동안 홍인길(김영삼 정부 때 총무비서관)씨 등은 유리창 밖으로 뜨거운 물을 부었고 일부 당원들은 창밖으로 책상, 걸상, 집기를 던졌다.

드디어 2시 20분께 당사는 경찰에 의해 완전 제압된다. 2,000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4층 여공들이 강제로 끌려 내려갔다. 경찰이 침입하는 와중에 김경숙 양이 뛰어내려 사망했다. 여공들이 통곡과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내려간 뒤 총재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50여명의 경찰병력은 “반항하면 가차 없이 패겠다”는 경고를 거듭하며 김영삼 총재를 먼저 끌어냈다. 다음 반항하던 최형우, 박권흠 의원 등이 구타를 당해 끌려 내려갔다.“

 

경찰은 연행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노동자들 중 김경숙씨(당시 21세)가 사망했다. 김영삼 총재는 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 갔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의 사망 경위를 강제 해산 직전에 스스로 동맥을 끊어 투신자살한 것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를 반박하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위원회는 추락 사망한 시점이 진압 개시 이후였고 동맥 절단 흔적이 없었으며 손등에 쇠파이프로 추정되는 둥근 관에 가격당한 상처와 후부두의 상처가 발견됐다며 경찰의 폭력 진압 사실을 규명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 근로자들의 생존투쟁이었으며, 야당 당사에서 투쟁을 함으로써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 사건은 후에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