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8월 3일] 콜럼버스 항해 떠나다…잔혹한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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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8월 3일] 콜럼버스 항해 떠나다…잔혹한 정복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02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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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에겐 신대륙 발견자, 원주민들에겐 살육과 착취의 사탄

 

서양인들 또는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인 후예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신대륙의 개척자라고 추앙한다. 미국에선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컬럼버스 데이’로 정해 기념한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그는 잔인한 살육자요, 정복자에 불과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초상화 /위키피디아

 

1492년 8월 3일 저녁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산타 마리아(Santa María) 호등 3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 남쪽 팔로스(Palos de la Frontera) 항을 떠났다. 나머지 두 배는 핀타(Pinta) 호와 산타 클라라(Santa Clara) 호였다.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떠나는 이 항해에는 모두 90명이 탔다. 선원은 물론 의사, 목수, 은세공사, 스페인 황실 사절, 아랍어 통역사등이 모였다.

컬럼버스는 앞서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밑줄을 그어 가며 탐독하고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을 만날 생각을 했다. 그의 항해일지에서 “이제 그레이트 칸을 만날 것”이라는 구절이 많이 보이는데,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중국으로 착각한 것이다.

세 척의 배는 미지의 대서양을 건넜다. 금방 도착할 것이라는 콜럼버스 선장의 말과 달리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거칠어졌다. 9월 24일 컬럼버스는 항해일지에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고 썼다.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그림) /위키피디아

 

10월이 되자 선원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콜럼버스는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라고 외쳤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나타났다. 핀타 호에 타고 있던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라고 외친 순간, 세계사는 바뀌었다.

그는 그곳이 인도나 일본이 있는 동양의 어느 곳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이 나타나자 컬럼버스는 인도 사람인줄 알고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중국 해변이라고 믿으면서 「동방견문록」의 ‘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의 과나하니 섬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했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그해 12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가져간 금제품이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그후 콜럼버스는 2차, 3차, 4차 항해를 떠났고, 1506년 죽을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상식 중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의 아메리카 대록 발견을 통해 갓 탄생한 스페인이 패권국이 되고, 유럽에 의한 세계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분명하다.

 

▲ 아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 앞에 선 콜롬버스 (1843년 그림) /위키피디아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은 원주민들에겐 재앙의 시작이었다. 서양의 사탄이 몰려온 것이다.

첫 번째 항해 이듬해인 1493년 이뤄진 2차 항해는 1차때보다 규모가 컸다. 17척의 선단에 1,200명이 탔는데, 그들은 모두 금에 미쳐 있었다.

콜럼버스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보니, 식민지 개척자로 남겨두었던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해 있었다. 콜럼버스는 분노로 들끓었다. 선원들은 무자비하게 원주민을 약탈하고 강간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하며 서양인들을 공격했다.

콜럼버스는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시를 건설하고, 스페인인들에게 토지를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 금 공납과 부역을 명령했다. 하지만 컬럼버스가 말한 금은보화가 그곳에 없었다. 선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난장판이 되어 갔다.

 

▲ 콜럼버스가 자메이카 원주민들에게 월식을 예언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역사가들은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를 '홀로코스트‘(집단학살)라고 명명했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조직적으로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 수백 명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다수는 항해 도중에 죽었다. 나머지 인디언들은 금을 가져오게 하여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실제로 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많은 원주민들은 도망갔고, 스페인인들은 이들을 사냥하듯 죽였다. 원주민들은 저항했지만 스페인의 우월한 무기에 역부족이었다.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절망 속에서 원주민들은 자식과 함께 집단자살했다. 25만 명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의 수는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노예화되고 사망률이 높은 대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한지 60년후에 타이노 원주민은 수백 명만이 남았고, 100년 후엔 손에 꼽을 인구만 남았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 잔혹한 정복자였다.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부터는 서서히 몰락했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502년 콜럼버스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가 마지못해 지원해 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하고,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페르난도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왕실에서는 아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 콜럼버스 항해 노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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