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내 고향은 어디인가? 하는 고민을 한 시절이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고향은 경북이고 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거든요. 예전에는 본적(本籍)을 따질 때가 많아 경북이 본적인 저는 그냥 경북 사람인가 보다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부모님 묘소 이장을 계기로 고향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친인척이 거의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고향은 제게는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 되었거든요.
고향의 정의와 수유리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에 의하면 ‘고향’은, 기본의미로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을 의미합니다. 보충적으로는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기본의미를 따르자면, 경북이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기에 고향이고, 서울 여러 곳이 제가 태어나 자라난 곳이기에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은 어디일까요. 이 질문을 처음 던졌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인 경북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서울 수유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까지 살았고 서교동으로 이사해 4학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역삼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교 졸업 무렵까지 살았습니다. 이들 서울 여러 동네가 떠올랐습니다. 이 중에서도 수유리가 좀 더 애틋하기는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2020년경 수유리 일대를 답사하며 관련 자료조사를 한 게 제가 도시 관련 글을 쓰게 된 계기였습니다.
수유리에서 저는 1966년부터 1974년 초까지 살았습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고향을 묘사할 때 시골집 뒷산이나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를 보여주듯 저는 수유리란 말을 들으면 우리 집 마당에서 보이던 북한산 인수봉과 동네 근처를 흐르던 우이천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울에 동제(洞制)가 시작된 게 1950년입니다. 수유리도 이때 수유동이 되었고요. 그러니 제가 어릴 적에 이미 수유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수유리로 알고 있듯 사람들은 수유리로 불렀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과거 신문 기사가 있습니다. 1971년 6월경 경향신문의 <웃음거리 도로 표지판>이라는 기사에서 서울의 행정지명이 ‘동(洞)’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인데도 도로 표지판에는 아직 ‘수유동을 수유리로 미아동을 미아리로’ 표기하고 있는 걸 꼬집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표지판뿐 아니라 시내버스 노선표에도 수유리로 적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수유동은 ‘한성부 성저십리 숭신방 수유촌계(水踰村契)’였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1911년에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소속으로 바뀌었습니다. 일제가 한성을 경성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경기도라는 지방에 속한 도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14년에 수유리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로 다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내내 수유동은 경기도 땅이었습니다.
광복 후인 1949년에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 서울로 재편입되며 수유리는 ‘성북구’ 관할이 됩니다. 당시 수유동은 ‘수유리’로 불렸는데 1950년에 서울시 조례에 의해 ‘수유동’으로 행정지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릅니다.
이 지역을 예전부터 부르던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습니다. ‘무너미’ 혹은 ‘무네미’. 물이 넘쳐 흐른다는 뜻입니다. 아마 북한산 계곡에서 물이 넘치면 마을로 흘러들었던 모양입니다. 이를 한자 물 ‘수(水)’와 넘칠 ‘유(踰)’로 옮겨 쓴 것이 지명으로 굳어졌고요.
그런데 이 지역에 특이한 지명이 하나 있습니다. ‘우이신설선’ 경전철 노선인 ‘화계역’과 ‘4·19민주묘지역’ 사이에 있는 ‘가오리역’이 그렇습니다. 산 근처 내륙 지역에 ‘가오리’가 웬 말일까요.
가오리(加五里)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지역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한성부의 범위는 한양 도성과 그 바깥 성저십리까지이지만 성저십리였던 이곳에서부터 오리(五里)를 더하여(加) 우이동까지 한성부 지역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도 앱으로 거리를 따져보니 혜화문에서 가오리역까지 직선거리로 약 6km이고 거기서 우이동까지는 약 2km입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면 더 먼 거리였을 겁니다. 성저십리가 거리를 정확히 십 리(약 4km)로 나눈 게 아니라는 걸 엿볼 수 있습니다.
4·19민주묘지·장미원·그린파크...
어른이 되어 수유리가 고향인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들과 수유리에 관한 기억을 나누다 보면 공통으로 기억하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4·19민주묘지’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가까워 그랬는지 ‘4·19민주묘지’에서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다음으로는 ‘장미원’을 떠올립니다. 장미원은 현재 우이신설 경전철 ‘가오리역’과 ‘4.19민주묘지역’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장미 농원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수유리의 많은 집에서 장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화단에도 장미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장미원에서 분양받은 거라 했습니다. 그런 장미원은 70년대 말에 문을 닫고 그 자리는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전통 시장 이름과 상점 이름으로만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린파크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2020년대에 ‘캐리비안 베이’가 있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그린파크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린파크는 원래 1968년 우이동에 문을 연 호텔인데 부속시설인 야외수영장이 더 유명했습니다. 하이슬라이더라는 미끄럼틀은 당시만 해도 첨단 놀이 시설이었습니다.
그린파크 자리는 현재 ‘파라스파라’라는 리조트가 들어섰습니다. 2009년부터 짓기 시작했으나, 시공사 부도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21년에 개장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수유동’으로 검색하면 연관어로 ‘단독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보입니다. 물론 맛집도 뜨지만요. 제가 살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거주 형태의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지난 수년간 답사할 때마다 없어지는 옛 주택들이 있는데 그 자리를 빌라 등 공동주택이 메우고 있습니다. 수유동이 계속 변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름철 수유동 일대 우이천을 지나노라면 물에서 노는 어린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수유동 모습을 그리워할지 모릅니다. 제가 과거 수유동의 모습을 그리워하듯이요.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