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90) 비행장, 5·16광장을 거쳐 여의도공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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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90) 비행장, 5·16광장을 거쳐 여의도공원으로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9.1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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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여의도(汝矣島)는 섬입니다. 북쪽으로 한강 본류가 흐르고 남쪽으로는 샛강이 흐릅니다. 여의도가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샛강이 평소에는 건천이라 영등포와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샛강과 영등포 사이를 가르며 지나는 올림픽대로 때문에 여의도가 육지의 섬처럼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도에 나온 여의도는 목축지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래사장 이십리(白沙周二十里)’라는 표기도 있듯 대부분 지역은 척박했을 겁니다. 이런 섬이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서며 외부 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광장이 들어서며 국민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곳이 된 거죠.

여의도의 비행장

1970년대 이전 여의도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여의도에 활주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의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1916년부터 용산과 가까운 여의도를 연병장으로 사용했습니다. 활주로와 격납고도 설치해 간이 비행장도 만들었습니다. 1922년에는 안창남의 시범 비행이 있어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지만, 친일파들의 비행기 헌납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여의도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만주를 항공으로 잇는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그래서 1928년부터는 ‘경성비행장’으로 불리며 본격적 비행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70년 11월경 본격적인 시가지 건설이 시작되기 전, 여의도비행장의 모습.  사진 하단에 보이는 다리는 여의도와 영등포를 잇는 서울교다. 사진제공=서울역사아카이브

1945년 광복 후 경성비행장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還國)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48년 5월 5일에는 여의도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항공 부대가’ 결성되면서 여의도는 우리나라 공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 여의도에 공군작전지휘소가 있었지만, 비행장은 여전히 미군이 관할했습니다. 1955년에야 미군 측은 여의도 비행장을 한국 측에 반환했습니다. 이후 규모를 키운 한국 공군은 여의도 인근의 대방동에 공군본부를 만들어 이전했습니다. 

여의도 비행장은 한때 국제공항이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는 1954년에 여의도에서 대만과 홍콩을 연결하는 국제 항공편을 운항했습니다. 하지만 여의도의 여러 한계로 인해 1961년 김포로 국제공항 기능을 넘겨주었습니다.

비행장 등 여의도의 공군 시설은 1971년까지 있었습니다. 성남시에 있는 서울공항이 여의도에 있었던 공군 기지의 후예입니다. 

여의대로. 과거에 5·16광장 혹은 여의도광장이었다. 유사시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로 계획되었다.

5·16 광장에서 여의도광장으로

여의도는 중앙에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여의대로가 지나고 그 옆에 여의도공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의도는 이들 두 시설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기도 합니다. 여의도를 가르는 여의대로와 여의도공원은 원래 광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의도 공군 기지가 성남으로 이전을 앞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장에게 여의도에 광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광장으로. 그러고는 지도에다 구획을 직접 그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시 고위공무원이었던 손정목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지요.

서울시장은 해외 유명 광장을 참고한 계획을 대통령에게 올렸습니다. 전문가에게 자문받은 그 계획에 광장은 녹지와 화단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원한 광장은 녹지 공간이 아닌 아스팔트 포장이 깔린 넓고 긴 광장이었습니다. 결국은 활주로였고 명칭은 ‘5·16 광장’으로 정해졌습니다. 

여의도광장의 C-47 수송기. 광복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이용한 비행기. 여의도 비행장은 독립지사들의 환국 통로였다.

광장 건설은 여의도 개발계획과 맞물렸습니다. 따라서 여의도 비행장 등 공군 시설은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때로 5·16 광장이 과거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 흔적이라고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는 동서 방향이었고, 5·16 광장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고 긴 광장은 유사시에 전투기 등이 이착륙할 수 있는 비상 활주로로 사용할 요량이었고, 평시에는 각종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광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습니다. 광장이 들어선 1970년대 초는 남과 북이 극한으로 대립하던 시기였고 준전시라고 보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접경 지역은 요새화가 되었고, 서울 인구 증가를 막는 한편 강남 분산을 추진했습니다. 방공호 등의 대피 시설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지하보도는 유사시에 방공호가 되었고 남산터널도 대피 시설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5·16 광장은 비상 활주로뿐 아니라 국군의날 열병식 등 위력 행사를 보이는 곳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평양의 김일성 광장의 규모, 그리고 광장에서 벌이는 행사의 군중 규모를 놓고 경쟁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체제 경쟁이 여의도에 광장이 들어서게 된 이유 중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듯 광장은 군사 목적뿐 아니라 군중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관제 집회를 열어 국력을 과시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1975년 5월에 열린 ‘총력안보시민궐기대회’에는 200만 명 이상이 모였다는 신문 기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의도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는 대통령 선거 때 연설회장이나 각종 종교집회 장소 등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KBS가 주최한 이산가족찾기 특별 방송 때에는 여의도광장이 만남의 광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의도공원 전경. 이전에는 광장이었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90년대 문민정부 시절은 군사정권 잔재 지우기가 과제였고 남북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의 민도가 올라가면서 동원을 위한 광장보다는 휴식을 주는 공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의도광장은 1997년부터 공원화가 진행되었고 1999년에 여의도공원으로 개장했습니다.

여의도공원의 면적은 22만 9539㎡로 약 6만 9000여 평입니다. 공원에는 한국 전통의 숲, 잔디마당, 문화의 마당, 자연생태의 숲 등 4개의 공간이 있습니다. 

공원 중앙으로 가면 비행기 모형이 놓여 있습니다. 1945년 임시정부 인사들의 환국을 기념한 시설입니다.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이 타고 온 기종인 C-47 수송기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의도공원은 여의도에서 일하는 이들은 물론 서울 시민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너른 여의대로는 과거 광장이었던 흔적인데 이를 아는 젊은 세대들은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지난 10주 동안 영등포 일대를 탐험했습니다. 추석이 코앞입니다. 이를 기념해 다음 주부터는 제 고향인 수유리를 몇 주간 다뤄볼까 합니다. 

여의도공원. 점심 무렵 인근 직장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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