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은 옮겨지고, 묘도 잊혀진 강감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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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은 옮겨지고, 묘도 잊혀진 강감찬 장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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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낙성대는 현대에 지은 건물…무덤도 1963년에 충청도에서 발견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 약속이 있어 갔다가 고려 명장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태어났다는 낙성대를(落星垈)를 들러보았다.

우리는 흔히 이 곳을 감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장군이 태어난 정확한 위치는 지금 웅장한 사당으로 신축된 낙성대가 아니라, 그곳에서 서울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쪽으로 400여m 가면 있는 강감찬 생가터다. 주소는 봉천동 218번지다.

지금의 낙성대는 1973~1974년 2년에 걸쳐 서울시가 일대를 정화하면서 담장을 쌓고 안국사(安國祠)라는 사당을 지어 낙성대공원이라 부르는 곳이다.

새로 만든 낙성대엔 본래의 생가터에 있던 3층 석탑이 옮겨졌는데, 그 석탑에는 감감찬 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3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의 높이는 4.48m다. 현재 낙성대공원에서 고려시대에 강감찬 장군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안국사 사당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광장에는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낙성대 공원의 강감찬 장군 /사진=김인영

 

강감찬에 관해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군이다. 강감찬은 고려 현종 9년(1018년) 거란의 3차 침공 때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고려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破驛)까지 나가 얼싸안고 환영하면서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 주었다고 한다.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고, 그를 기념하는 사당의 이름도 여기서 따 안국사라고 했다.

낙성대란 이름은 중국 송(宋)나라 사신이 들어오다가 어느 집에서 큰 별이 떨어져 사람을 보내 찾아보게 했더니 그 곳의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 송나라 사신은 그 아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을 문곡성이라 했는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그후 그곳을 ‘별이 떨어진 곳’, 즉 낙성대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강감찬 장군 사당인 안국사 /사진=김인영

 

감감찬에 얽힌 설화가 많다. 그가 시대의 영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안국사에 모신 강감찬 장군 초상화 /사진=김인영

감감찬이 소년의 나이에 어느 고을의 원님이 되어 부임했다. 어린 그를 본 관속들은 공공연히 얕잡아보았는데, 어느날 강감찬이 관속들을 불러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집어넣어보라고 명했다. 관속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고 호통쳤다. 이렇게 해서 관속들의 기를 꺾었다고 한다.

또 그가 어느 고을에 부임하여 여름날 업무를 보는데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아전에게 부적을 써주면서 못에 던지게 했더니 다시는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 전승되고 있다.

그가 호랑이를 퇴치했다는 설화도 있는데,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묵은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해친다는 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 크게 꾸짖고는 앞으로는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낙성대 3층석탑에 얽힌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탑의 위층을 빼 한 층을 낮추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갔다고 한다. 왜적들은 탑만이 아니라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안국사 정문 /사진=김인영

 

서울시는 1974년 6월 10일 안국사를 완공한후 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공원의 총면적은 3만1,350㎡이며, 성역화된 곳은 1만1,550㎡이다.

서울 관악구는 1988년부터 매년 10월 낙성대 공원에서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추모제로 인헌제를 지내고 있다. 인헌제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인 인헌(仁憲)에서 따왔다.

본래의 낙성대(강감찬 생가터)는 서울시 기념물 3호로 지정되어 있고, 3층 석탑의 본래 자리에는 1974년 2m 높이의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했다. 낙성대공원내 안국사로 옮겨진 3층석탑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안국사에 옮겨진 3층석탑 /사진=김인영

강감찬의 묘는 엉뚱하게도 1963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 것 같다.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옥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설명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손으로 강빈도 강감찬의 후손에 해당하는데, 강빈은 인조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잊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예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마을 이름도 ‘큰 인물이 났다’는 의미의 국사리(國仕里)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 구전을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 하던 끝에 '姜邯贊'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했다. 문화재 위원들도 당시 이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후 이 곳을 강감찬 묘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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