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고소한 북한 이야기] 북한소설 '벗'이 프랑스에서 대박난 이유?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겨레말 소설 「벗」 인간 삶의 향기와 뭉클함을 독자들의 가슴에 던져줘 뉴욕타임즈 "우리의 예상을 뒤흔들어버린 소설"

2021-04-19     박기찬 신한은행 북한연구회 대외협력 회장
박기찬

[박기찬 신한은행 북한연구회 대외협력 회장] 북한 대표작가 백남룡의 소설 「벗(Des Ami)」은 2011년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말 문학 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이 소설은 프렌드(Friend)란 이름으로 미국의 잡지 라이브러리 저널(Library Journal)의 ‘2020년 최고의 세계문학 10선’에 뽑혔다. 이들 나라의 독자들을 사로잡은 소설 「벗」의 남다른 매력은 무엇일까?

라이브러리 저널은 “이 작품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그 가치가 특별하게 높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신문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북한 가정의 갈등과 여성들의 야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우리의 예상을 뒤흔들어 버린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1988년에 쓰여진 이 소설의 창문을 들여다보면, 북한의 가정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들이 생생하게 보인다. 그 중에서 몇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을 비디오클립 형태로 살펴 보자. 

소설

이혼과 가정내 갈등을 촘촘하고 아름답게 묘사 

... 녀인은 격정을 높였다. 울분은 피아노 연주가의 손길처럼 중음 구역에서 고음 구역으로 쉽사리 올라갔다. 그러더니 동정심을 일으키는 애잔한 절망으로 떨어졌다. ... “그 사람하고는 생활리듬이 통 맞지 않아요.” ...

백남룡의 이야기에는 항상 현장의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마치 소설속 그 곳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여자 가수의 하소연에는 메조 소프라노의 중저음이 살아 있고, 기계공장 노동자에 대한 묘사에는 비릿한 기계기름 냄새가 느껴질 정도이다.

소설

채순희, 한은옥 - 여성의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기주장

... “저는 가수예요. 노래를 사랑하고 관중을 사랑해요. 남편과의 고통스러운 생활 때문에... 저의 리상을 ... 앞날을 희생할 수 없어요.” ...

남편의 성공을 위하여 자기 일을 포기하는 헌신적이고 유교적인 여자는 안 보인다. 그들은 가사 일을 남편에게 당당히 맡기면서 자기 일에 대한 애착과 사명감에 항상 넘쳐있다. 기계공장 근로자에서 예술단 전업가수가 된 순희는, 선반공 남편에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도 다니고 더 성장하기를 요구한다.  

리춘식, 아바이 근로자 - 직장 내 승진과 자아성취의 고민

... “시대청년다운 열정과 진취성을 가지고 자기 매력을 개발해 보오. 근실한 령감티 나는 기능공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멋쟁이 기능공 청년답게 외모부터 쭉 빼고 다니오. 공장대학에도 가고...” ... 

근로자로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직하고 우직하게 열정을 다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 공부도 병행하고 승진기회에도 적극 응하면서 더 큰 자기 성장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은 이 소설에서 계속되는 기본 주제 중 하나이다.

정진우 판사 - 가정의 소중함과 공동체 의식

... “수일 전에 판사 동무가 주물모레를 이 배낭에 넣어 가져왔댔소. 내가 모레 질이 나빠 골머리를 앓는 걸 보고 글쎄 저 앞 강에서 파오지 않았겠소. 물이 얼음처럼 찼겠는데...” 

우리에겐 없는 소설속 판사의 역할이 신선하다. 문서로 제시된 증거와 법률로만 판단하는 우리식 판사가 아니다. 주인공 정진우 판사는 이혼 문제를 판단하기 위하여 당사자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양쪽의 직장 및 이웃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러 다닌다. 가정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공동체의 이익과 희망을 위한 기초라고 믿기 때문이다.

... 일요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물결이 흘러간다. 가정을 이루거나 가정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가정을 떠난 사람은 없다. 가정은 인간의 사랑이 살고 미래가 자라는 아름다운 세계이다. ...

백남룡 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 요소 

이 소설에서는, 이혼 가정에서 어렵게 자랄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에 대한 무척이나 걱정스런 시선, 그리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아내가 주는 일상의 불편함을 누르면서 집안일을 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1949년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백남룡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한국 전래동화와 이솝우화를 들려주던 어머니는 목재공장에서 일하시다 작가가 11살 되는 해에 돌아가셨다. 작가는 또한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고 한다.

백남룡은 고등중학교(고등학교)를 마치고 지방의 기계공장에서 10년간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등단하여 전업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걸어 온 결코 쉽지 않았을 삶의 여정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의 삶에서 묻어나는 애환과 희망을 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따뜻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소설

이념과 언어 장벽을 넘어선 감동

체제와 이념의 가림막 그리고 프랑스어, 영어 등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많은 이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은 이 소설의 비결은 북한 가정에 대한 엿보기 호기심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녀의 사랑과 이혼, 자식과 가족, 직장과 자아성취, 공동체 의식 등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면서도, 이것들을 관통하는 인간 삶의 향기와 뭉클함을 독자들의 가슴에 던져 주고 있다는 점이 소설 「벗」의 성공 비결일 것이다.

북한을 14번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사진작가 아람 판은 지난 2016년 8월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북한 주민들이 걱정하는 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 세대의 자식 걱정, 근로자들의 회사에서 승진 생각이 가장 컸다."

● 필자인 박기찬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MBA를 마친 금융인으로, 글로벌하고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한반도 이슈에 접근하는 북한연구자이다. 신한은행 북한연구회 대외협력회장을 맡고 있으며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