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비극’ 예멘, 56년 내전에 28만 난민 신청

2천만 인구 식량·의료등 구호 필요…통일후 시아, 수니 내전 확대 김인영 기자l승인2018.06.2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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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게 무엇인가, 이념은 왜 인민을 이토록 피로 물들이고 있는가, 종교는 왜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가, 나라의 통일은 숱한 피를 흘려야 하는가.

이토록 많은 의문을 남기며 56년째 내전을 치르는 곳이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예멘이라는 나라다.

제주도에 예멘 국민 500여명이 난민신청을 하면서 국내에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논란이 뜨겁다. 이에 앞서 예멘이란 나라는 어찌해 저 멀리 한국 땅에 숱한 국민들을 떠나 보내야 했는지를 들여다 보자.

 

▲ 예멘 난민 /유엔난민기구(UNHCR)

 

예멘(Yemen)의 개략을 살펴보면, 국토 면적은 52만7,968㎢로 대한민국의 5배 이상 넓고, 인구는 2,891만명로, 우리나라의 절반쯤이다. 종교는 대부분 이슬람으로, 수니파 53%, 시아파 47%로 비슷한 분포를 하고 있다. 수도는 사나(Sanaa).

유엔난민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에 따르면, 오랜 내전으로 지금 현재 200만명이 집을 떠나 생존을 이어가고, 인구의 75%에 해당하는 2,000만명 이상의 무고한 예멘인들이 인간적 도움이 필요로 하다.

많은 예멘인들이 기아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극도의 빈곤으로 식량과 물, 의료, 피난처가 우선 필요하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다. 내전으로 인한 극도의 폭력을 피해 28만명 이상이 난민을 신청했다.

예멘의 비극은 50년 이상 오래 되었고, 그 기간에 양상도 변해갔다. 왕당파와 공화파, 좌파와 우파, 남과 북, 수니아 시아파의 복잡한 구조를 지나며 이해세력들은 무력투쟁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려 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이란, 나아가 미국과 러시아가 개입했고, 그러는 사이에 힘들고 죽어가는 것은 국민이었다.

예멘 내전의 역사를 짚어 본다.

 

① 시바 여왕의 나라

 

예멘은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시바(Sheba) 여왕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을 찾아와 솔로몬왕과 사랑을 나누었던 시바 여왕은 아라비아 남쪽과 홍해 건너편 에티오피아, 지부티 등을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7세기에 이슬람 수니파가 평야 지역에, 시아파가 고원 지역에 세력을 형성했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쿠에게 정복당했다가 1839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증기선 저탄기지로 아덴항을 점령하면서 영국의 보호령으로 되었다.

1차 대전에서 패전국 오스만투르크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영국은 1918년 북예멘을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지배 하에 두었다. 분단의 시초다.

비극은 1962년 북예멘의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다.

 

② 1962년 북예멘 공화파 쿠데타

 

독립한 북예멘은 그럭저럭 왕정을 유지하며 유지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후인 1962년 대령 출신인 아브둘라 살랄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추방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했다. 왕당파는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저항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북예맨의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이웃 사우디와 요르단이 왕당파를 지원하고, 이집트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전투는 수도 사나 주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집트는 최고 7만명의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공화파는 도시와 해안지역을, 왕당파는 내륙과 산악지대를 장악했다. 결국은 이집트 군의 개입으로 공화파의 승리로 기울었다.

공화파 내에서도 내분이 발생해 1967년 공화파의 살랄 정권이 무너지고, 온건파인 이리야니 정권은 수립되어 왕당파와 화해를 추진했다. 하지만 왕당파가 정권 참여를 주장하자 화해가 깨졌다.

북예멘의 내전은 1970년 정전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7년간의 내전에서 무려 2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자료: 위키피디아

 

③ 남예멘 독립후 남북 전쟁

1967년 영국 식민지였던 남예멘이 독립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해방전선은 ‘예멘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북예멘과 통일을 추구했다. 남북 예멘은 ‘아덴협정’을 체결했지만, 국경문제를 놓고 견해를 달리했다.

1979년 4월 양측의 대립은 무력충돌로 전개되었다. 전투는 국경의 사막지대에서 3개월간 전개되었고, 아랍 정상회담의 중재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국경분쟁은 남예멘 정권 내의 노선 갈등을 야기해 1986년 다시 내전상태에 돌입해 양측은 수천 명의 군대를 투입하면서 반년 간 싸웠다. 남예멘의 무하마드 대통령이 북예멘에 망명함으로써 내전은 종식되었다.

이 내전으로 약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④ 남북 예멘 통일

분단후 남·북 예멘은 상이한 길을 걸었다. 북쪽은 왕정을 거쳐 공화정을 채택한 반면, 남쪽은 사회주의체제를 채택해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컸다.

하지만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외세에 의해 서로 다른 시기에 독립하면서 분단된 상태를 통합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한때 국경 분쟁도 치렀지만, 동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1980년 4월 남예멘에 온건파인 나세르 모하메드가 집권하면서 통일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1981년 11월 북예멘 대통령 살레흐가 남예멘을 처음 방문했고, 12월에는 남북통합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어 1983년에는 예멘 최고평의회가 구성되어 통일 작업이 구체화되었다.

남과 북의 두 예멘은 1990년 통일을 선언했다. 양측 지도자들은 1993년 4월 총선을 실시해 연립정부를 구성키로 약속했다.

1991년 5월 16일 통일헌법이 제정되고 통일 이후 30개월의 과도기간을 둔 다음 인구 비례로 대통령위원회를 설치, 중요한 국정 운영을 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북예멘 대통령 살레흐, 부통령으로 남예멘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알리 살림 알리베이드가 취임했다. 또 북예멘 국가자문평의회와 남예멘 최고인민회의, 그리고 임명직 의원을 합쳐 301명의 통일 의회를 구성했다.

 

⑤ 남부 분리주의 운동

 

약속대로, 1993년 4월 통일 후 첫 총선에서 대통령 살레흐가 이끄는 대중의회당(GPC)이 121석을 차지해 최대당이 되어 연정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해 8월 남예멘 출신 부대통령 알리 살림 알베이드가 수도 사나에서 열릴 회의에 불참하고, 아덴에 남겠다고 선언하면서 정국이 불안해졌다.

이유는 권력 배분 문제였다. 남예멘 출신 부통령이 북예멘 출신 대통령에 반발했다. 1994년 5월 남예멘이 다시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양측이 군대를 동원해 다시 내전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한 북예멘이 남예멘을 점령하면서 내전은 종식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남예멘 게릴라들이 준동하면서 불안이 계속되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남부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나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남부 분리주의자들은 재분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상황이 악화되면서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예멘 남부 사람들은 통일 후 중앙정부의 차별정책으로 남부 지역의 경제난이 심화되었고, 북예멘 주민들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 지원도 상대적으로 북예멘보다 열악하다고 주장한다.

 

▲ 자료: 위키피디아

 

⑥ 알카에다 침투

 

오랜 내전과 중앙통치력의 부재는 종교적 원리주의자들이 뿌리내리기 좋은 토양을 형성했다.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참사 직후 알 카에다 무장세력이 예멘 남부지역에서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예멘 정부군은 미국의 지원으로 알 카에다 소탕작전을 전개해 2012년 6월 자르, 진지바르, 슈크라 등 알카에다 3개 주요 거점을 탈환했다. 알카에다는 동부 산악지대로 흩어진 정부군을 대상으로 한 테러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2012년 12월과 2013년 9월 발생한 송유관 폭발은 알카에다 세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2013년 3월 테러세력들은 사우디 외교관을 납치해 동료들의 석방과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 자료: 위키피디아

 

⑦ 수니-시아파 내전

 

예멘 북부 지역 산악지역에는 시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정치인 후세인 알 후티(Hussein al-Houthi)는 1994년 자신의 이름을 따 시아파의 분파인 자이드파의 무장단체 후티(Houthis)를 조직했다.

2004년 6월 알 후티의 반군은 수니파 예멘 정부에 반기를 들며 북서부 사다 지역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9월 알 후티는 예멘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2014년 9월,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이듬해 1월에는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이에 압드 라부 만수르 알 하디 대통령이 예멘의 남부 지역으로 피신하고, 후티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아덴을 중심으로 남부 지방 정부는 후티 정부의 통치를 거부했고,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국들은 사나에 있는 대사관을 철수하고 아덴의 하디 정부를 지지했다. 이에 하디 대통령은 사임을 취소하고 아덴으로 정부를 옮겼다.

2015년 3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군사지원을 받은 정부연합군이 공습을 개시하여 현재까지 예멘 전 지역에서 정부군과 내전이 진행 중이다. 후티 반군은 지난해 12월 예멘을 33년간 통치했던 알리 압둘라 살레흐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도 했다.

현재 후티군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지지를 받고, 아덴의 하디 정부는 사우디와 수니파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예멘은 북부의 알 후티 반군, 남부의 하디 정부로 다시 분리되었다. 여기에 남부 분리주의 운동, 동부와 남부 알카에다 무장세력의 활동 등 여러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이 와중에 예멘인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해외로 나가 망명신청을 하는 난민신세가 되어 버렸다.


김인영 기자  inkim@go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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