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71) 조선시대에 군인들이 살았다던 광희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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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71) 조선시대에 군인들이 살았다던 광희문 일대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5.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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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 칼럼니스트] 지난 3주 동안 을지로6가와 7가 일대를 탐험했습니다.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나 밀리오레 같은 의류상가가 이 지역의 경관을 대표하지만, 과거에는 종합운동장이, 더 오래전에는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 겁니다.

이 지역을 연구한 문헌들을 살펴보면 훈련원 인근 특히 광희문 방면에 군인과 그 가족들이 사는 동네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에서 오늘날 군부대 근처를 떠올려봤습니다. 군인아파트가 있고 군인 대상으로 하는 상업 시설 등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요. 아마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 않았을까요.

청계천 남쪽의 ‘아래대’ 군인 마을

조선시대 한양의 주거 공간을 구분할 때 주로 북촌과 남촌을 예로 들지만, ‘우대’와 ‘아래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우대는 위쪽 동네를 의미하고 아래대는 아래쪽 동네를 의미합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을 위로 남쪽을 아래로 삼았다는 설명도 있고, 지형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우대는 도성의 서북쪽 즉 인왕산 부근에 들어선 동네들로 아전이나 별감 등 주로 이서(吏胥) 계층이 살았습니다. 오늘날 서촌 일대인데 궁궐과 관아가 가까워 왕가와 양반들도 살았습니다.

아래대는 동대문에서 청계천 남쪽으로 이어지는 광희문 방면의 동네를 말합니다. 주로 오군영 소속의 군인들과 하급 무관, 그리고 이들의 가족이 모여 살았습니다.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지역은 지대가 낮고 청계천과 가까워 수해 피해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청계천 인근에 가옥 건축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성 안 인구가 많아지면서 청계천 오염이 심해지자 영조는 대규모 준설사업을 벌였습니다.

이때 청계천 일대가 정비됐고 주변으로 택지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계천 주위로 마을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방산동의 이름이 이때의 흔적입니다. 청계천 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천변에 쌓았는데 마치 산처럼 보여 가산(假山)이라 불렀고, 여기에 무궁화를 심어 그 향기가 만발했다는 의미에서 방산(芳山)이라는 지명이 탄생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동대문 일대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시전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사상이 지금의 종로5가와 가까운 배오개 일대에서 성행해진 겁니다. 

문헌 연구를 종합하면, 17세기에는 예지동에 있었던 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상업 행위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집 앞에 점포를 열어 직접 만든 제품을 팔거나 배오개장 등의 사상과 거래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에는 배오개장이 종로시전, 칠패와 더불어 한양의 3대 시장에 꼽힐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때의 주요 품목이 훈련원과 왕십리 일대에서 재배한 채소류였고, 군인들이 임금으로 받은 면포나 이들이 제조한 신발, 전립, 망건 등도 주요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나라에서 군인들에게 상행위를 허락한 건 녹봉이 낮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주지 못할 때가 많아서였을 겁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군인들이 거래한 면포는 나라에서 세금으로 걷은 것이라 질이 매우 좋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포목을 취급하는 건 물론 의류 제조 및 판매 등 동대문 일대 시장의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동대문 일대의 패션산업을 있게 한 여러 뿌리 중 한 자락이 조선 후기의 군인과 그 가족들의 상행위에서 비롯된 거라고 보는 거죠.

과거 동산말이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 광희동의 한 골목. 인근의 도로보다 고지대에 있는 이 동네는 골목 구획이 반듯하지 않은 등 과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사진=강대호

아래대 마을의 흔적

근대에서 현대로 오며 아래대 즉 동대문에서 청계천을 건너 광희문 방면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훈련원이 있던 자리는 병원이나 학교, 혹은 운동장으로 바뀌었고, 운동장은 또다시 현대적 건축물로 자처하는 DDP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DDP 주변에는 크고 작은 의류 상가들이 들어섰습니다.

결국 아래대에 있었다던 군인 마을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당시 자취일 수도 있는 동네가 눈에 띄었습니다. DDP 남쪽 건너편, 정확히는 을지로와 퇴계로 사이의 삼각형 필지입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희동입니다.

이 필지 안쪽에는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집들이 꼬불꼬불한 골목들 사이에 들어서 있습니다. 서류상 1950년대나 60년대에 준공해 게스트하우스나 사무실 등으로 쓰는 건물들도 있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낡은 목조주택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골목 구획을 보면 이 동네가 들어선 건 더욱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형성된 마을에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빈 곳마다 들어선 집들로 구획이 복잡해진 모습입니다.

퇴계로 방면에서 삼각형 필지의 골목으로 올라가는 계단. 골목 안쪽에 조선시대에 동산말이라는 마을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사진=강대호

관련 문헌을 종합하면, 조선시대에 이 삼각형 필지 일대에 ‘뱃골’과 ‘동산말’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뱃골은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동산말은 나지막한 동산에 들어선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퇴계로 쪽에서 삼각형 필지의 동네로 들어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혹시 오래전 옛날 이 동네에 군인들이 살았을지 상상하며 걸어봤습니다. 그런데 이 필지의 끝자락, 즉 광희동과 신당동이 마주하는 지점에 인상적 디자인의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퇴계로를 사이에 두고 광희문과 마주한 자리입니다.

하얗고 둥그런 굴곡을 가진 이 건물은 1966년에 준공된 ‘서 산부인과’ 건물이었는데 1995년부터는 어느 회사의 사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건물의 건축주는 산부인과 의사 ‘서병준’이었고, 건축가는 ‘김중업’이었습니다. 김중업은 김수근과 함께 국내 1세대 건축가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서병준 의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시구문 옆 산부인과

그런데 저는 이 건물과 광희문이 서 있는 구도에서 임응식 사진작가의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이 사진은 1955년 광희문 일대를 담은 작품입니다. 그 사진에는 목조인 문루가 사라지고 석축과 홍예만 남은 건축물 근처에 ‘시구문 참기름집’이라는 깃발과 산부인과 간판이 보입니다. 

원래 도로 위, 그러니까 퇴계로 위에 있었던 광희문을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걸 고려하면 임응식의 사진에 나온 산부인과 간판의 위치와 김중업이 설계한 산부인과의 위치가 비슷해 보입니다. 

서산부인과였던 건물(오른쪽)과 광희문. 둘 사이에 있는 도로는 퇴계로다. 사진=강대호

물론 1955년의 사진 속 산부인과가 ‘서 산부인과’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일대에서 산부인과가 번창했던 건 사실일 듯합니다. 병원과 가까운 장충동과 광희동, 그리고 신당동은 한국전쟁 후 사람들이 몰려와 산 동네라 아마도 아이들도 많이 태어났을 테니까요. 임응식 작가의 사진 속에서도 아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건물이 자리한 곳은 광희동과 신당동의 경계입니다. 오늘날 두 동은 같은 중구에 속하지만, 한양도성이 헐리기 전에는 도성 안과 바깥 지역으로 엄격히 구분되었을 동네입니다. 성벽이 사라지자 같은 생활권을 공유하는 이웃 동네가 되었지만요. 

혹시 임응식 작가가 촬영한 1955년의 광희문과 그 일대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진이 등장하는 글들이 꽤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신당동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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