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 첫 문화재 등록…수악주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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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유적지 첫 문화재 등록…수악주둔소
  • 김현민
  • 승인 2018.06.0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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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가을에 축조…역사 현장으로서 의미

 

제주 4·3 사건의 무장 세력이 궤멸 직전이던 1949년 가을께,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 산 2-1번지 일대에 경찰에 의해 수악주둔소(水嶽駐屯所)가 만들어졌다.

위치는 수악의 동남쪽이며 신례천과 하례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산이다. 주둔소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서 쌓았으며, 외성은 회곽을 이루고 있다. 회곽의 바깥쪽 높이는 3.5m 정도였으며, 내벽은 2m 가량 되었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250평 정도이다.

이 주둔소는 주변을 조망하기에 아주 적지였다고 한다. 남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 효돈 쪽까지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한남리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과 북쪽으로는 물오름 주변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수악주둔소를 만드는 작업에 인근의 신례리와 하례리는 물론 서귀포시 상효동 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성을 쌓고 나서는 경찰토벌대의 지휘 하에 토벌을 다녔는데, 인근의 마을에서 올라와 이 주둔소에 집결하고는 토벌을 하였다고 한다.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사업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주둔소의 정문 앞쪽에는 높이 6m 정도의 숙이낭(삼나무)을 박아서, 나무 꼭대기에 주둔소 표시를 하는 하얀 깃발을 달았다고 한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에 따르면, 토벌대가 토벌과정에서 사로잡은 유격대의 머리를 잘라 그 나무 꼭대기에 걸었다가 며칠 후에 그 머리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한다. 한 증언자는 지금 그 밑을 파 보면 머리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당시 경찰은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했는데, 1952년 4월에는 제주도 전역에 32개의 주둔소가 있었다고 한다. 주둔소엔 마을주민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경찰 1명과 마을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경계를 했으며, 토벌대 60명이 동시에 취침 및 식사를 할 수 있을 규모의 주둔소도 있었다.

 

▲ 등록문화재 제716호 제주 4·3 수악주둔소 (망루시설) /문화재청

 

수악주둔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외성과 내성의 전체적인 둘레는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과 높이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내부의 모습도 건물이 있었던 곳과 난방을 했던 아궁이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화장실 터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는 올렛목과 내성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목의 흔적들도 밑돌로나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등록문화재 제716호 제주 4·3 수악주둔소 (항공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8일 「제주 4·3 수악주둔소」를 국가문화재로 제716호로 등록했다. 문화재청은 제주 4‧3사건의 흔적이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 유적도 극소수인 상태에서 제주 4‧3사건을 재조명하고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한 역사적 현장으로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등록 이유를 밝혔다.

제주 4·3사건 유적지 가운데 이번이 첫 등록된 문화재다.

 

▲ 수악주둔소 위치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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