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도굴범이 파헤친 백제 벽돌무덤, 80년만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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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도굴범이 파헤친 백제 벽돌무덤, 80년만에 확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6.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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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교촌리에서 가루베가 발굴한 고분 발굴…무령왕릉과 유사 형태

 

일제강점기에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이란 일본인 전문 도굴범이 있었다.

▲ 가루베 지온

그의 아버지는 일본 교토에서 골동품상을 했다. 그는 1925년 계획적으로 식민지 조선 땅에 들어왔다. 이후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해 학교에 향토관을 세우고 전시용 유물을 발굴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동원해 백제유물 수집에 나섰다.

그는 교육자의 탈을 쓴 도굴꾼이었다. 그가 도굴한 백제 고분은 1,000기나 된다고 한다. 그는 백제 최대고분군인 공주 송산리 고분을 헤집고 다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을 수집해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가루베는 도굴범이었지만 백제문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고고학적 훈련이 없이 시굴작업을 했지만, 나름 백제문화 연구의 초기연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국내 학자들의 지적이 있다. 아마추어였지만 공주 공산성을 백제 왕성이라고 결론내리는 등, 초기 백제 연구자라는 것이다.

 

▲ 공주 교촌리 3호분 북벽 /문화재청

 

가루베 지온이라는 이름이 다시 거명되었다. 공주대 박물관이 공주 교촌리 3호 고분이 가루베가 발굴하던 고분이라고 밝혀 낸 것이다.

가루베는 1939년 교촌리의 한 고분에서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무덤 안에 점토(진흙)가 가득 차 있고, 들어가는 길이 완성되어 있지 않아 미완성 고분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당대 고고학 대가였던 경주박물관의 사이토 다다시(齊藤忠) 관장이 반박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 후 가루베가 발굴한 무덤에 대한 발굴과 연구 작업은 답보 상태에 빠졌고, 그 위치도 미궁에 빠졌다.

 

▲ 공주 교촌리 3호분 /문화재청

 

공주시와 공주박물관이 지난 12월부터 공주 교촌리 일대에 대한 발굴을 추진했다. 그랬더니, 공주시 교동 252-1 소재 3호 고분에서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백제 시대 벽돌무덤이 발굴되었다. 전축분이란 벽돌로 널방을 만들고 주검을 넣은 무덤을 말한다.

이번 발굴로 가루베가 발굴한 전축분 무덤의 위치가 80년만에 확인된 것이다.

 

교촌리 전축분의 존재는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공주목조(公州牧條) 부분에 “향교의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조선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새롭게 발견한 교촌리 3호 전축분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 같은 터널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무덤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모두 무늬가 없는 네모꼴과 긴네모꼴이며, 벽면은 벽돌을 가로로 쌓아서 만들었다. 이는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다른 모습이다.

공주박물관측은 가루베가 주장한 것처럼 교촌리 전축분이 무령왕릉 축조를 위한 연습용의 미완성분인지, 아니면 백제 웅진기에 도입된 중국식 상장례 도입과 함께 수용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인지, 무령왕릉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 격의 무덤인지 등 해당 고분의 구체적인 성격을 검토할 예정이다.

발굴팀 관계자는 "이번 조사에서 전축분 주변에 본래 점토가 많고, 무덤길에 나무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무령왕릉의 가창(假窓, 창문시설)은 없으나, 등잔 등을 놓는 감실(龕室, 움푹 판 구멍)이 있어 조심스럽게 해석하면 무령왕릉보다 이른 시기 왕릉급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백제 웅진기에 만들어진 전축분은 그 사례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과 6호 전축분이 있다. 다행히 이번에 진행된 교촌리 3호분에 대한 재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 공주 교촌봉 석축 단서실의 연화문 문양 /문화재청

 

발굴팀은 또 공주향교 뒤쪽의 ‘교촌봉’ 정상부에서는 백제 시대 석축 단시설을 조사했다. 이 시설도 1939년 가루베의 조사를 통하여 2호 전축분이라고 정의했으나, 이번 발굴조사 결과 전축분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네모꼴의 석축 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석축 단시설은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며, 주변에서 무령왕릉에서 나온 문양 벽돌과 같은 연화문(蓮花文) 벽돌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중요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교촌봉’ 정상에서 조사된 방형의 석축 단시설을 통해 백제 시대 국가의 제례시설 존재를 함께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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