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성지…“이곳이 새남터 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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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이곳이 새남터 형장입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6.0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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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신부 주문모, 조선 최초 신부 김대건, 프랑스 신부등 11명 순교지

 

서울지하철 1호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한강 쪽으로 우뚝 선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절인가? 높고 뾰족한 일본식 누각이 저곳에 왜 서 있을까?

용산역에서 내려, 한강 쪽으로 가다가 서부이촌동으로 방향을 꺾으면, 그 건물을 만날 수 있다.

 

▲ 천주교 새남터기념성당 /김인영

 

그 건물은 바로 천주교 새남터기념성당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만에 완공했다.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음역해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다. 조선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어 사육신과 남이장군의 처형 장소이기도 하다.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 곳에서 처형당했다.

이들 중에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인 프랑스의 앵베르 주교등 11명의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9분의 성인유해가 소성당에 모셔져 있다.

 

▲ 성당 전면의 처형장

 

성당입구에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바로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100여년 전에 있었을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눈에 선하다.

무수한 의문이 스쳐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서 천주교가 이땅에서 인정되었던가. 왜 조선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죽여야 했을까. 왜 신자들은 배교를 하지 않고 종교에 목숨을 걸었을까.

 

▲ 김대건 신부상 /김인영

 

성당 오른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상이 서 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여느 조선 선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순교했다. 왜 그의 집안은 4대째 공자님의 소중화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빠졌을까.

성당 왼편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상이 놓여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다.

그 옆에는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의 비석이 놓여 져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해하자는 것이며,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는 뜻이다. 대원군이 전국에 세운 척화비의 글귀다. 주문모는 서양오랑캐의 사상을 조선에 심으려다 죽은 것이다.

 

▲ 주문모 신부상과 척화비 /김인영

 

조선말, 사대부와 백성들은 목자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어린 양을 돌보기 위해 1795년 북경교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는 이 땅에서 처음으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했다. 그가 한양에 들어온지 6년만에 신자의 수가 6,000명으로 늘어났다.

주문모는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게 되었고, 자신만 없으면 박해가 그칠 것으로 생각해 중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겪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한다. 주문모 신부는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이 사건을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라 한다.

신유년의 박해 후 30년이 흘러 1831년 조선교구가 세워졌다. 이후 프랑스 신부들이 입국했고, 신자수가 9,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조선교구는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소년들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9년 기해년에 또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프랑스 선교사 세명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 12일 익산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도착해 귀국했다. 이후 복음화에 힘쓰다 1846년 6월 서해 뱃길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백령도 부근으로 나갔다가 관헌에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도 마침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신부의 나이 26세였다.

 

▲ 당시 사횽모습 조형도

 

새남터에선 주문모, 김대건 신부 이외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그리고 ‘기해일기’의 주인공인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1명의 순교자들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한국천주교회는 1956년 새남터 땅을 매입해 ‘가톨릭 순교성지’라 새긴 현양비를 세웠고, 1981년 한강성당에서 분가하여 서부이촌동, 한강로, 원효로 등을 구역으로 하는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사상과 종교는 때로 시대 이데올로기에 반한다. 많은 살육이 행해진다. 구질서가 무너진다. 그리고 새 사상, 종교가 들어온다.

백수십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킨 구질서의 사상은 어디로 갔는가. 그 낡은 사상은 그들이 떠받들던 왕조 국가를 멸망케 하지 않았는가.

이런 의문들이 새남터를 맴돌았다.

 

▲ 천주교 새남터기념성당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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