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개천으로도 불렸습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내다'라는 뜻으로 자연 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를 의미합니다. 청계천이 개천으로 불린 이유는 하천 공사와 관련 깊습니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양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심 한가운데로 흐르던 청계천으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 도성 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습니다.
자연 하천이 개천이 되다
태종은 ‘개천도감’을 설치해 청계천의 양안에 돌을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때의 공사를 계기로 ‘개천’이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 정비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청계천으로 바로 연결했습니다. 이 크고 작은 물길들이 오늘날 강북 도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되기도 했습니다.
세종 시절 청계천은 생활 하천이 되었습니다. 즉 도성에서 배출되는 생활 쓰레기를 흘려보내는 하수도의 기능을 하게 된 거죠. 하지만 왜란과 호란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이후 많은 유민(流民)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습니다. 생활하수는 청계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증가했습니다.
이때부터 ‘개천’이 구정물 흐르는 지저분한 도랑을 은유하는 명사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청계천이 오염되자 영조는 두 차례 준천(濬川) 사업을 벌였습니다. 청계천에 두껍게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확장했습니다. 상류와 지류는 물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 안팎의 배수로도 준설(浚渫)해 물이 잘 통하게 했습니다.
그런 청계천 일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도시 빈민들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청계천 등 서울 도심의 하천은 지붕이 뚫린 하수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염과 악취 그 자체였는데 나라에서 가장 선호한 해결책은 그냥 덮어버리고 치워버리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은 복개되고 그 일대의 판자촌은 철거되었습니다.
개천을 덮었다가 다시 열다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청계천은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광교에서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동대문 인근에서 신설동까지, 1970년부터 1977년 사이에 신설동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습니다.
복개된 자리에는 고가도로가 놓였습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로였습니다. 삼일고가도로라고도 불린 이 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 착공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습니다. 고가도로 아래는 ‘청계로’라는 도로가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공사가 이어진 청계천은 또 대형 공사를 겪게 됩니다. 청계고가로를 해체하고 청계천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고가도로가 오래되어 안전에 문제가 있고 주변 지역이 슬럼화하고 있다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2003년부터 시작된 공사로 고가도로는 철거되고 청계천은 포장을 뜯어냈습니다. 하천과 그 주변은 정비되었습니다. 황학동의 풍물시장도 그런 곳 중 한 곳입니다. 중구를 다룰 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2005년 10월 청계천은 그렇게 복원되었습니다. 청계로는 다시 청계천이 되었고요.
청계천을 걷다
청계천은 광화문 네거리 인근 청계광장 아래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아닌 인공 구조물에서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이 청계천을 흐르게 합니다. 그 많은 물은 어디서 흘러오는 걸까요? 청계천은 과거 복개된 후에 건천이 되어버렸는데 말이죠.
오늘날 청계천을 흐르는 물은 서울지하철에서 나오는 지하수와 한강의 물을 적당히 섞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계천은 모터 펌프로 물을 끌어오는 일종의 인공하천인 겁니다.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남북 양안의 하천 변에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청계천 북쪽은 종로구에 속하고 남쪽은 중구에 속합니다. 하류로 가면서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지납니다.
청계천에는 조선시대에 건설한 교량을 복원하거나 이름을 따와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다리가 광통교입니다. 옛 흔적이 남아있는 돌들로 석축을 쌓았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석축에 이용한 돌들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강비의 묘에서 가져온 돌들입니다.
광통교는 태종 시절에 건설했는데 강비는 태종의 정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강비 묘의 석재를 사람들이 밟고 지나는 교량의 자재로 쓰는 거도 모자라 문양이 있는 돌들 일부를 거꾸로 놓았습니다.
청계천 산책로는 종일 사람으로 붐빕니다. 국내외 관광객도 많지만,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로 붐빕니다. 산책로를 인간들만 찾는 건 아닙니다. 잘 들여다보면 동물들도 살고 있습니다. 참새와 같은 텃새는 물론 왜가리, 쇠백로, 청둥오리 등의 물새를 흔히 볼 수 있고 잉어를 비롯한 여러 종의 수상 생물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로3가쯤 가면 청계천 주변 풍광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광화문에서 종각쯤까지 청계천 주변이 높은 빌딩 숲이었다면 종로3가쯤부터는 낮은 건물이 이어집니다. 특히 전통시장이 계속 이어집니다. 청계천 남쪽의 방산시장과 북쪽의 광장시장, 그리고 동대문종합시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기다랗게 이어진 평화시장 건물도 인상적입니다.
청계천 인근은 오래도록 서민들의 생활 터전이었습니다. 청계천 변에 이들의 주거지가 있었고 청계천이 복개된 후에는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산업을 대표했던 봉제업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이 사람들 뇌리에 박히게 된 계기도 청계천과 관련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 바로 청계천입니다. 비극적 노동 환경에 떠밀린 청계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사업주들의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며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청계천 6가의 ‘전태일다리’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습니다.
청계천은 광화문 근처에서 시작해 동대문의 오간수문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집니다. 다음 기회에 오간수문 너머의 청계천 일대를 다루겠습니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옛 교량의 흔적 등 조선시대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배수로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쓰레기 취급을 받은 거 같습니다. 배수로 유적 등 많은 유물을 하수종말처리장에 보관했다는데 이후 행방을 모른다고 하네요. 공사 지연을 우려한 정치적 결정으로 대충 넘어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나마 복원한 유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광통교가 그렇습니다. 원래 위치도 아니고 제 규격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 자연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오늘날 기다란 시멘트 수로 혹은 수조 같기도 합니다. 모터로 물을 끌어들이고 거기에 물고기를 풀어 놓은 거대한 수조 말입니다. 시각을 바꾸면 다르게 보이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청계천이 특히 그러합니다.
지난 1월부터 종로구의 여러 동네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 다루지 못한 곳은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4월부터는 청계천 남쪽의 중구 지역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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