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 삼척읍성을 둘러보자
상태바
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 삼척읍성을 둘러보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5.03 2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라시대 이래 동해안 치소로 자리매김…읍성 복원으로 관광자원화 절실

 

‘읍’(邑)이라는 한자어는 성(城)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의미한다. 종묘와 왕궁을 둘러싼 도읍(都邑)은 별도로 도성(都城)이라는 별칭을 쓰고, 지방의 성곽 도시를 읍성(邑城)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지방에는 서산의 해미(海美)읍성, 순천 낙안(樂安)읍성, 부산 동래(東萊)읍성, 전북 고창(高敞)읍성 등이 복원되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성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기도 하며, 지방의 치소(治所)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읍성으로 조선 정조 때 만들어진 수원 화성(華城)을 들수 있다.

 

▲ 삼척시 성북삼거리 읍성 성곽길 조감도 /삼척시

 

고려·조선시대에 강원도 동해안 지방을 관장하던 삼척(三陟)에도 읍성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철거되어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 삼척읍성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최근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삼척읍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삼척시는 순천 낙안이나 서산 해미처럼 옛 읍성을 재현해 관광자원화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시가지 도시재생 우선사업으로 성내동 구도심(대학로) 지역에 옛 읍성도시를 재현, 죽서루와 연계한 테마보행로 조성사업을 벌인다는 방침이다. 이 사업에는 시비 5억원이 투입되는데, 성북삼거리 육교를 활용해 죽서루에서 대학로까지 200m의 읍성도시 성곽길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기본 콘셉트 정리와 실시설계를 거쳐 7월 이전에 착공할 예정이다.

 

▲ 해동지도(海東地圖, 18세기)에 나타난 삼척읍성 /강원고고문화연구원

 

그러면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 때 헐리기 이전의 삼척읍성을 답사해 보기로 하자.

문혼에 나오는 삼척읍성은 「고려사절요」에 정종 2년(947년)에 삼척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 되었다. 고려시대에 읍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세종실록」 지리지 삼척도호부 조에 “삼척읍성은 토성(土城)이고, 둘레가 540보이며, 죽서루(竹西樓)가 읍성 가운데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척읍성은 삼면이 석성(石城)이고, 둘레가 2,054척, 높이가 4척이며, 서편 성벽 431척은 절벽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두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삼척읍성은 「세종실록」 지리지가 편찬된 1454년에는 토성이었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530년에는 보다 단단한 석성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 사이에 흙성을 허물고 돌성으로 다시 쌓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게다가 서편 성벽은 죽서루의 자연절벽을 활용했고, 동쪽과 남쪽, 북쪽의 삼면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삼척읍성 축성에 대한 기록(읍지류)에 따르면 고려 정종 2년(947년)에 쌓았다고 하지만 구체적이지 못하고,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둘레 1,470척(445m), 높이 4척(1.2m) 규모로 토성이 축조되었으며 서쪽 절벽으로 431척(131m)였다고 한다.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증축하고 중종 5년(1540년)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3면의 길이가 2,504척(622m)이고 서쪽 죽서루 절벽 지역의 431척(131m)은 자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중종 10년(1515년)에 개수했고, 명종 10년(1555년)에 민가 20여호를 철거시켜 우물을 팠고, 선조 25년(1592년)에 회(灰)를 첨가해 개축했다고 전한다.

 

▲ 삼척읍 성내동 /네이버 지도

 

삼척읍성은 사라졌지만, 읍성의 흔적은 삼척 시내에 성내동(城內洞)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성내동은 읍성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성내동의 행정 경계가 옛날 읍성이 있었던 자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종합하면 삼척읍성은 삼척 시내 중심가를 둘러싼 구릉지를 자연지형을 하면서 곡선으로 쌓은 성이다. 오십천 가에 위치해 서쪽 절벽 위에는 관동8경의 제1경인 죽서루(竹西樓)가 있고, 남쪽은 평지, 북과 동쪽은 얕은 구릉지다.

조선시대에 삼척은 영동지방에서는 최대 규모의 행정조직을 갖춘 도시였다. 정3품의 부사(府使)가 행정을 총괄하고, 향교의 교수(종6품), 삼척 포진의 영장(營將, 정3품 무관)등 많은 행정기관과 관원들이 배속되었다. 강릉에서 경북 평해까지 15개 역참을 관장했던 찰방(察訪, 정6품)도 삼척에 주재했다.

 

▲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삼척읍성 터 /강원고고문화연구원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3차에 걸쳐 삼척읍성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에서 「세종실록」 지리지 등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삼척읍성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고려말 1386년에 축조된 판축토성(폭 7.4m, 잔존길이 33m)과 조선전기 1510년에 축조된 석성(폭 3.5m, 잔존길이 30m)의 실체가 모두 드러났다. 특히 토성의 외벽을 따라 약 4m 간격으로 영정주를 받쳤던 적심시설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문헌기록에만 존재하던 삼척읍성의 토성과 석성이 모두 확인되었다.

당시 발굴조사에서 삼척도호부와 관련된 관아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또 조선시대 유구(遺構) 하층에서 신라와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구가 계속 남아 있었다.

죽서루 주변은 삼척읍성과 삼척도호부 관아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다. 발굴을 통해 신라시대 수혈 주거지, 고려시대 토성, 조선 전기의 석성, 그리고 삼척도호부의 관아 시설과 고려시대 관아였던 것으로 보이는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또 신라시대 7~8세기 수혈주거지에서 인화문 합, 단경호, 등잔, 벼루 등이 수습되었다. 고려시대 전 시기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고려 상감청자, 연화문 막새기와, ‘삼척군정축명’(三陟郡丁丑銘)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조선 관아 시설은 객사구역, 동헌 구역, 연근당지 등이 조사되었는데, 건물지는 진주관, 응벽헌(추정), 내삼문, 동헌, 아전이 확인되었다. 죽서루 동남쪽의 정면 8칸 건물지는 연근당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결과로, 삼척 죽서루 주변 일대가 이미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삼척의 중요한 치소(治所, 지방행정기관이 있는 곳)로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당시 발굴조사에서 삼척관아의 동헌은 옛 삼척등기소 자리로 확인되었다. 삼척부의 객사는 원래 죽서루 아래쪽에 있었다가 중종 12년(1517년)에 북쪽으로 옮겨 짓고 진주관(眞州館)이라고 했다. 옮겨 지은 곳이 지금의 삼척문화원 자리다.

 

▲ 삼척 기줄다리기 행사 /문화재청

 

삼척에선 예로부터 정월대보름에 기줄다리기 행사를 했다. 이기는 쪽에는 풍년이 든다는 믿음도 있었고, 진 쪽에서는 삼척읍성 수리나 제방 수리등 노역을 했다고 했다. 해마다 기줄다리기 대회가 치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삼척시는 삼척읍성에 대한 종합적인 정비·복원계획을 수립해 죽서루 주변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우선 성곽길을 재현해 삼척읍성의 옛모습을 떠올려 보기로 한 것이다.

 

▲ 삼척읍성(토성) 전경 /강원고고문화연구원
▲ 죽서루 진입시설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 건물지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 삼척읍성 석성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