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에 쓸쓸히 세워진 안중근 의사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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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쓸쓸히 세워진 안중근 의사 가묘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3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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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회복하면 고국에 묻으라” 했건만, 순국 108년 되도록 유해 못 찾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이자 원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문효세자는 5세에 사망하고 그곳에 묻혔는데, 고종 7년(1870년) 12월에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왕실의 묘역이었던만큼 효창원은 지금처럼 공원이 아니라,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宣惠廳)의 창고(만리창)에 야영하며 숲이 파헤쳤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주둔하며 독립군 소탕을 위한 비밀작전기지로도 사용했고,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이 곳을 일반인이 드나드는 효창공원으로 지정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고, 김구는 일본 밀정의 지휘소였던 이곳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열사들의 묘소로 사용키로 했다. 1946년 7월 9일에 김구에 의해 동산 위에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등의 3인의 독립운동가 묘소가 만들어 졌다. 1949년 7월 5일에는 국민장을 치른 김구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 /사진=김인영

 

효창공원 3의사 묘소에 가면 비석이 세 개인데 무덤은 네 개다. 비석이 있는 3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다.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0. 8. 10~1932. 10. 10)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독립투사였다.

윤봉길 의사(尹奉吉, 1908.6.21. ~ 1932. 12. 19.)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국왕 생일 축하겸 전승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단장을 죽였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에 대해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백정기 의사(白貞基, 1896. 1. 19.~1934. 6. 5.)는 무정부주의자로 친일 압잡이를 처단하고 일본 원흉들을 처단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 효창공원 삼의사 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사진=김인영

 

비석이 없는 무덤은 안중근 의사의 가묘다. 가묘(假墓)란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임시 묘라는 의미다.

안중근(安重根)의 순국일은 1910년 3월 26일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서글프게도 후손들은 순국한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묘소가 비석이 없는 가묘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묘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해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 /사진=김인영

 

순국 당시 뤼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안 의사 사형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 의사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년 3∼4월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뼈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땅이 파헤쳐져 당초 목표로 삼았던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측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북한측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신지 108년이 지났는데,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돌아오길 쓸쓸히 고대하고 있다.

 

▲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 상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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