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3회> 돌도끼와 '우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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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낙규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3회> 돌도끼와 '우주의 기억'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5.07.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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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뢰즈가 본 연천 구석기 축제
③'나'에게 갇히지 말고,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사유하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다양체이다. 다양체란 어떤 존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적 가능성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잠재성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변용을 할 수 있는지, 역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른다.

영화 ‘루시’에서 보통사람은 잠재력의 10% 정도만 발휘한다. 잠재력을 20%, 30% 더 떨치면서 점점 초능력을 보이다가 마지막 장면에 잠재력을 100% 발휘하면서 루시는 신(神)이 된다.

인간은 엄청난 누층이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생성과정 속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지나간 현재가 재생을 겪지 않고 과거 안에 담겨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잠재성은 그냥 저장되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실성과 유리되어 있지 않으며 잠재성 자체가 생성의 차원이다. 자기 자신을 현실화하는 잠재성의 운동인 분화(differenciation)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베르그송에 의하면 생명이 그 자신 속에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폭발력에 의해 추동되며, 들뢰즈는 대상과 마주쳐서 결정되지 않은 잠재적 과거지대로 투신해야 한다고 본다. 외적 자극과 내적 호응이다.

 

▲ 축제장 동물원의 새가 한 아이의 머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무한한 잠재성과 시간의 기억을 가진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사진 강낙규

존재의 현실화 과정은 미리 규정된 어떤 질서를 갖지 않은 하나의 창조적 진화다. 기존의 관습이나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동일성의 논리, 표상주의, 재현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이를 들뢰즈는 '헐벗은 반복', '물질적 반복', '빈약한 반복', '차이를 낳지 않은 반복'이란 표현으로 개념화한다.

본질, 실체, 이데아, 영원한 것 등 본질주의에서는 시간이 빠져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들은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제논(Zenon)의 역설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100미터 경주에서 앞서 출발하는 거북을 아킬레스는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그 양자의 운동 자체로 동일화함으로써 본성적으로 다른 운동의 질을 같은 공간 속에서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하고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본성상의 차이를 정도상의 차이로 보는 이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실재의 다양성을 일반관념으로 묶어버린다.

반면 '풍요로운 반복', '옷 입은 반복'은 차이를 낳고 내적 존재들이 수축하면서 질적 차이를 생성한다.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목소리를 되찾아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되살린다.

나 자신은 다양체 그 자체이다. 내 안에는 본성적으로 다른 성격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자신 속에 있는 사자, 양, 독수리, 뱀, 악마, 천사 같은 다양한 성격의 뇌관 중 어느것이 먼저 뇌관을 터뜨릴지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물질적 조건이나 환경과 대면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내부 주름들에 따라 선택할 따름이다.

칸의 연인 전도연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속에는 여러 전도연이 있는 것 같아요. 사자 같은 나, 천사 같은 나, 악마 같은 나 등 수만 가지의 ‘나’가 있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나’가 나오는 것 같아요”.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시간 속에서 사유하게 해준다. 이를 촉발시키는 것이 사유의 강제이다. 정다운 대화가 아닌 참을 수 없는 폭력, 전쟁 같은 감정상태를 동반하는 사유의 강제.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크리스탈이미지, 시간이미지 영화이다. 크리스탈이미지 영화는 실재와 상상,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과거와 현재, 기억과 지각, 어두움과 투명함의 식별불가능성을 형성한다. 과거인지 현재인지, 지각인지 기억인지 본성상 완전히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는 지점이다. 새로운 사유를 전개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실재의 새로운 측면들을 우리에게 막 던져준다. 지각이 행위로 연장되는 것을 막아 인과적 연계를 끊고 비합리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사태가 뭔지를 모르게 되고 결국 ‘사유의 무능력’에 마주치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순간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사유,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함으로써 수많은 기억들을 가져오고 이미지들은 풍부해진다. 클리셰(상투적인 것, 판에 박힌 것)로부터 빠져나와 더 깊은 생명의 직관으로부터 솟구치는 거대한 힘들을 마주하게 된다.

시간은 미결정된 잠재적 실재 속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혹은 우리의 관심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망설이고 구체화함으로써 삶의 시간을 창조한다. 시간이미지는 눈에 이미지화되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하여 사유와 관조의 대상, 언어화될 수 없는 뭉클한 감정, 삶을 되돌아보게 할 무엇, 눈에 보이지 않는 지층을 발견하게 해준다.

즉 이미지의 탈영토화, 탈중심화, 서사구조의 깨뜨림, 이미지와 이미지의 무리수적 만남(알고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세계, 관점을 봄)으로 이미지의 지층을 헤집고 다닌다. 현재와 과거, 과거전체가 공존하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시간의 존재와 마주치게 된다. 즉 생의 직관과 마주친다. 미결정된 잠재적 실재 속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혹은 상응하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망설이고 구체화함으로써 삶의 시간을 창조한다. 잠재적 실체 전체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현실화가 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전직 조종사 겸 엔지니어인 쿠퍼는 그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역량의 특정 부분을 촉발시키고, 그는 잠재력을 회상하고 떠올려 현재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존재는 합성 가능한 관계성들의 배치와 관계 확충으로 능력을 배가할 수 있다.

생명은 한 개체 속에 존재하기보다는 개체와 개체의 이어짐 자체에 있지는 않을까? 각 개체는 생명의 정거장으로, 자식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어짐이 생명이고 그 개체 속에서 창조를 해나갈 때 창조적 진화가 일어난다. 베르그송은 기억이 생명이고 그 자체가 지속이라고 한다.

기억은 지나온 과거 전체를 보존했다가 현재의 유용성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하는 정신의 운동성을 말한다. 기억의 원뿔 도식에 의하면 원뿔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데 원뿔의 꼭지점은 현실과 만나는 지점이고, 원뿔의 밑면으로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넓어지는 순수기억의 영역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도 그 자신 안에 과거 전체를 보존하고 있다. 그로 인해 다른 존재와의 본성적 차이뿐만 아니라 지속 안에서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된다.

연천 한탄강의 아슐리안 돌도끼는 26만년의 시간의 두께를 자기 안에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그 이전의 과거 역시 돌도끼에 새겨져 있다. 호모 에렉투스에게도 그 이전의 순수과거가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

수없이 긴 시간의 축적이 기억의 심연 속에 있다. 잠재적 실재는 하나의 대양이며 자연 그 자체이다. 바슐라르는 '상상은 우주적 무의식'이라고 했다. 우리는 회상을 통해서 돌도끼와 호모 에렉투스를 따라 긴 과거로의 도약을 통해 잠재적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바쁘다는 것은 현재에만 관심을 가져 과거를 회상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적 관심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추억은 되살아난다. 잠재적 과거의 결정되지 않은 지대로 투신하여 거기서 내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특정한 면을 붙들어 그것을 끌고 나와 지각 가능한 현실로 구성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보고 들은 은하수와 별자리, 별똥별과 방아 찧는 토끼 이야기가 아이로 하여금 소설가, 화가, 탐험가, 우주비행사 등 무한한 가능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원뿔의 꼭지점과 원뿔 밑면의 순수회상 사이에 있을 그 무수한 판(plan)들, 그리고 그 판 위에서 이리저리 잠재해 있는, 망설이고 있는 지대로 여행을 떠나 자기에게 맞는 것을 캐내어서 인생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잠재성이라는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캘 수도 있고, 금이나 은, 구리 등 자신에게 맞는 유용한 것을 캐내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 축제장에서 즐거워하는 할아버지의 웃음. 우리 개개인은 '생명의 정거장'이고,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이어짐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이다. /사진 강낙규

 

현재를 우주 전체로 확장시켜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전 우주에 걸친 현재의 시간이라는 관념을 상상해보자. 과거를 안다는 것은 우주 역사를 안다는 것이고 현실적 유용성과 무관한 우주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과거의 모든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

26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 700만년 전 투마이, 46억년 전 지구의 생성이 '지속'이라는 가느다란 실로써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유를 드러내 주는 비사유, 끊임없는 창조, 생성, 새로운 것을 만나는 방향을 지향하는 탈영토화의 극한, 우주적 기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주 전체의 지속과 나의 지속이 맞닿는다.

따라서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기억, 거대한 우주적 원뿔이다. 한 아이가 우주일 수 있고 우주가 한 아이가 될 수 있다. 우주 전체의 지속과 나의 지속이 맞닿아 있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네 가지 역설로 이를 설명한다. 과거는 그 자신이던 현재와 동시간적(동시성)이며 과거와 현재는 연속하는 두 계기가 아니라 공존하는 두 요소이며(공존), 모든 시간의 근거로서 과거가 먼저 존재하며(순수과거의 선재), 과거전체는 자기 자신과 공존한다(과거전체와의 공존성).

일상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중 누가 가장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누구나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잠재성을 발휘하여 저마다의 꽃을 피우게 도와주어야 한다.

각자의 존재에게 고유의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 모든 시간이 수능과 입사 시험에 맞춰지고 그것이 인생에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다른 인생의 결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폭력의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영토화되었던 과거 전체의 시간 그 자체를 구해내는 것이 문제이다.

엘랑비탈(elan vital, 생의 약동)과 치열한 도전이 요구된다.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어 생명이 자기 내부에서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폭발력을 촉발시키게 도와줘야 한다.

어떤 누구의 강요나 규정, 지시와 관련없는 순수한 삶, 미리 주어진 질서의 모방이나 발견이 아니라 의미와 관계의 창조 즉 열린 전체 안에서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살게 도와줘야 한다. 물이 홈 파인 공간에서 모든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잠재적 공간인 매끈한 공간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각각의 존재에게 고유의 순수함을 복원시켜줘야 한다.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처 난 상태를 긍정하고 사랑을 믿고 삶을 믿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존재의 고유함에 대하여 긍정하도록 믿음을 줘야 한다. 믿음이란 바닥을 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깨닫게 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계를 긍정하게 한다. 우주 전체의 시각으로 보면 나의 문제는 하찮은 문제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우리의 삶이다. 나에게 갇히지 말고 기억 속으로,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서 사유하자.

구석기 유물인 아슐리안 돌도끼는 지각되지 않은 채 잠재적인 즉자적 존재로 그냥 있었다. 우리가 돌도끼의 존재를 경험할 때 원뿔의 꼭지점과 맨 밑면의 순수회상 사이에 있을 무수한 판들, 판 위에 잠재해 있는 원자, 분자, 양자, 진동, 빛, 열, 강도뿐만 아니라 그 돌도끼의 특정 시간에 돌도끼이게끔 해주는 주변의 모든 우주적 실재 전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돌도끼의 감정과 시간 전체를 경험한다.

아슐리안 돌도끼와 함께 우주 전체의 기억으로 떠나보자. <3회 끝>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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