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지금 내 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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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지금 내 곁에는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8.04.1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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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벚꽃에서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조병수 프리랜서] 미세먼지와 변덕스런 날씨에 잔뜩 움츠리고 있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은빛 솜털 보송보송한 냇가의 버들강아지를 바라보며 철 이른 기지개 켜던 때가 엊그제 인데, 어느 틈에 피어난 하얀 벚꽃들이 마음을 앗아간다.

꽃봉오리 내밀던 목련화(花)도 어느새 뽀얀 자태를 뽐내고, 연보라 라일락, 샛노란 개나리꽃···. 해마다 찾아오던 그 꽃잎 그 잎새들인데, 이제껏 흘려보다 오늘 문득 새롭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봄기운 환하게 채우던 벚꽃 잎들이 바람 에 시달리다 속절없이 떨어져간다. 어둠이 깔리면서 비바람으로 바뀐다. 흔들리는 가지에 매달린 채 파르르 떨고 있는 꽃잎들의 몸짓이 애잔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흩날리는 그 꽃잎들 따라, 아름다운 봄날의 정경(情景)이 쉬 사라질 것 같아 안타깝다.

 

엄동설한 이겨내며 싹 틔우고 꽃 피워 놓았더니 그걸 저리도 모질게 흔들어 대다니···.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어 올리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는 영국시인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의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그 시인은 ‘소생(蘇生)을 재촉 당하는 생명체의 고뇌를 역설적으로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저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만 각인되어 남아있다.

 

 

아침이 밝았다. 간밤의 비바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다. 주변의 벚꽃들도 따뜻한 햇살아래 반짝인다. 거친 비바람을 감당하기엔 한없이 여려 보이던 그 꽃잎들이 저토록 강인했던가 싶다.

그 시련 그 도전 꿋꿋이 이겨내며 주어진 역할 다하다가, 정해진 시간되면 알아서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그 끈질긴 생명력과 엄숙한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포근하게 감싸 도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벚꽃 잎 따라서 마음도 두둥실 파란 하늘을 나른다.

 

“따스한 햇살아래 나부끼는 저 꽃잎

가녀린 여인들의 춤사위 손짓같이

봄바람 물결 따라 춤추듯 흩날리네

 

어제 밤 꽃샘바람 온몸으로 견디며

가로등 불빛마저 애처롭던 그 모습

밟기도 안타까워 소복소복 가슴에”

 

 

약속이 있어서 서울시내로 나갔다. 저만치 남산이 온통 벚꽃으로 덮여 있다. 한번 올라가보라는 권유에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남산타워 행 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산길을 오르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벚나무들과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별천지를 이룬다. 눈에다, 가슴에다 담기에도 바쁘다.

 

팔각정부근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삼삼오오 어울리며 자연 속에 파묻힌다. 남산타워부근의 음악소리가 조금은 거슬리지만, 모처럼 보는 맑은 하늘과 화사한 벚꽃, 그리고 저만치 서울의 산하가 모든 것을 끌어 안는다.

 

정장(正裝)에 가방까지 들고 홀로 서성이기가 어색해서 바쁘게 한 바퀴 둘러보고 말았지만, 미루지 않고 오늘 와보기를 잘했다 싶다. 지척에 두고 수시로 지나다니던 산이지만, 도대체 몇 년 만에 올라와본 것인지···.

 

옛적에 드나들던 그 감흥을 되새기고 싶어서, 내려올 때는 산책로를 따라서 걷기로 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고전학자 겸 시인인 하우스먼(A. E. Houseman:1859~1936)이 ‘벚나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인 봄철이 나의 인생에서 20번이나 지나고, 이제 50번 밖에 남지 않았음’을 헤아린 그 마음을 따라 가본다.

 

『가장 사랑스러운 나무(Loveliest of Trees)』라는 그의 시에서 찬미했던 그 벚꽃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 이 순간이, 이런 봄날이 지금 온전히 내 곁에 있는데, 저만치 있는 내일(來日)만 바라보며 자꾸 미루기만 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이런 벚꽃군락을 완상(玩賞)할 기회가 이제 몇 번이나 남아있을지는 우리 소관이 아니지 않는가. 모름지기 오늘,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4월이다.

 

봄철에 잠깐 피는 이 연약한 벚꽃들도 세찬 비바람을 견뎌내며 제 소임(所任)을 다하는데···.

 

▲ 남산 팔각정 부근의 오후 /사진=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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