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 3만이 산동반도로 원정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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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 3만이 산동반도로 원정간 까닭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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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년 唐 요청에 출병…고구려 후예 이정기 후손의 치청왕국 멸망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가을 7월, 당나라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임금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운주(鄆州)는 지금 산동반도 제령(濟寧)이다. 이 때는 고구려·백제가 멸망한지도 150년이 지난 시점이다. 삼한을 통일한 신라가 왜 3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산동반도로 출병시켰을까.

당시는 고구려가 멸망한 자리에 발해가 들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해로를 타고 산동반도로 건너갔을 것이다.

3만이란 군사는 당대로는 엄청난 군대다. 660년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멸하러 황산벌로 달려갔을 때 동원한 군사는 5만명, 그해 일본이 백제를 도우러 파병했다가 백강(白江) 전투에서 전멸한 군사가 4만명이었다. 전시도 아닌 평화기였기 때문에 3만명의 병사는 신라로선 최대로 동원할수 있는 병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요하(遼河) 일대를 공격한 적은 있지만 국경의 연장선상에서의 원정이었고, 해로를 이용해 원정한 것은 819년 신라의 산동반도 원정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면 신라가 자국의 국방이 위협받지 않는데도 당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멀리 산동반도에 3만의 군대를 출병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산동반도에는 4대에 걸쳐 55년간 지배한 고구려 후예들의 왕국이 있었다. 이른바 치청(淄靑)왕국이다. 창업자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李正己)이고, 신라가 출병할 때는 4대째 이사도(李師道)가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기구한 운명이다. 668년 고구려는 신라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의 침공에 멸망했다. 150년후 고구려 후손이 산동반도에 세운 왕국도 당나라의 진압에 신라의 지원으로 운명을 다했다.

 

▲ /그래픽=김현민

 

그 스토리를 펼쳐보기로 하자. 실마리는 이정기(李正己, 732~781)라는 인물로 시작한다.

이정기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당나라 영주(營州)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성장했다.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당나라에서 출세한 고선지(高仙芝), 왕모중(王毛仲)이 모두 군인 출신이었다. 영주는 지금의 요령성으로 요하 서쪽에 있으며, 이 곳에는 옛 고구려와 가까워 당나라에 끌려온 유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회옥은 처음에 영주부장(營州部將)의 직책에 있었다. 소속은 평로군(平盧軍).

그가 23살이던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한다. 전쟁, 내란은 군인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회옥은 고모의 아들인 후희일(侯希逸)과 함께 토벌군으로 참전한다.

758년 평로군 절도사 왕현지가 병사하자, 당 조정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절도사 자리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이회옥은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帥)로 추대했다. 당 조정은 내란 수습을 위해 어쩔수 없이 후희일을 인정했다. 하지만 평로군은 북방 해족(奚族)의 공격을 강하게 받았다.

중국 북동부에 주둔하던 평로군은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부대로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족의 공격으로 거점히 흔들리자 평로군 2만명은 후희일과 이회옥의 지휘로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건너갔다.

당 조정은 후희일에게 치주(淄州), 청주(靑州) 등 6개주를 관장하게 하고,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을 주었다. 이회옥은 후희일을 돕는 부장(副將)이었다.

하지만 후희일은 당 조정의 신임에 만족해 정치에 태만하게 되고, 불교사원 건축 등에 힘써 통치구역의 경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반면에 이희옥의 인기는 높아갔다. 후희일은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희옥을 부장 자리에서 해임한다.

기회가 왔다. 765년 이희옥은 부하들의 지지를 얻어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 자리에 올랐다. 군인들이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하극상을 일으켜 절도사 자리를 채어간 것이다.

당 조정은 반란에 의해 지방정권을 장악한 이희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절도사들이 군벌을 형성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치청절도사 이희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 황제는 이희옥에게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내렸다. 산동반도 군벌로서 신라와 발해와의 교역로를 확보하는 책임자로 인정한 것이다. 아울러 당 황제는 그에게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하 이정기)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당시 발해와 신라의 조공과 교역은 서해 해상로를 통해 이정기의 지배영역인 산동반도와 연결되었다. 서해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정기는 군사력을 확대해 차츰 산동일대를 복속시켜 치(淄), 청(青), 제(齊), 해(海), 등(登), 래(萊), 기(沂), 밀(蜜), 덕(德), 체(棣) 10주를 확보했다. 775년에는 이웃한 절도사 이영요의 반란에 토벌군으로 나서 당나라 요충지인 서주(徐州)를 비롯한 조(曹), 박(濮), 예(兗), 운(鄆) 5주를 더 얻어 15개주를 차지했다. 이정기는 당시 주변의 절도사들이 보유한 7~9주의 영토, 5만~9만의 군사보다 많은 10만이상의 군사력, 540만(84만호)명에 달하는 인구를 확보해 번진(藩鎭)의 절도사로는 최고 강력한 군벌을 형성했다.

 

▲ 이정기 상 /중국 국립박물관 사이트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이 일어난 후 당나라 말기에 절도사는 관할 구역에서 군사, 재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절도사들은 차츰 자립의 움직임을 보였고, 지위를 세습하면서, 영내에서 세금을 걷어 중앙정부에 바치지 않고 자립경제를 꾸려 나갔다.

이정기의 산동반도에는 당시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차지하는 거대한 염전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 당나라 곡물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정도의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게다가 신라와 발해와의 무역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이 이정기 세력을 더욱 강력하게 했다.

이정기는 앞서 자신이 쫓아낸 후희일과 달리 당 조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서서히 세력을 키워 황제의 나라 당과 한판 대결을 꿈꾼 것이다. 779년 이정기는 치청의 수도를 청주에서 서쪽 운주로 옮겼다. 당 수도 장안과 가까워진 것이다. 한번 붙어보자는 심산이었다. 이정기는 주변의 이보신등 절도사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마침내 당과 치청왕국의 두 세력은 전쟁에 돌입한다. 절도사 세습 문제로 절도사 연합군과 당군은 강회(江淮)에서 대치했다. 결과는 절도사 연합군의 대승이었다. 이정기는 10만 대군을 투입해 대운하가 지나가는 길목을 점령했다. 대운하 장악은 중앙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정기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가던 중, 자신의 몸에 고질병이 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치의 암이었다. 그는 아들 이납(李納)에게 지위를 물려 주고 죽었다.

절도사 자리는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정기는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산동반도가 자신의 영토였던 것이다.

 

▲ /동북아역사재단

 

당나라가 이납의 절도사 지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납은 당나라와 전투를 벌였다.

782년 11월 이납은 국호를 제(濟)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실상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그는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나라로서의 갖춰 나갔다. 이때 다른 번진들 가운데 기왕(冀王), 위왕(魏王), 조왕(趙王)을 칭하는 자들이 등장했다. 여러 번진이 당나라에 대항하자, 당나라 덕종은 이들이 당에 반기를 한 것을 사면해주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당나라로부터 번진의 독립성을 인정받자, 이납 등은 왕호를 철회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일단 끝냈다. 이납이 왕호를 폐지한 것은 당나라와 타협하려는 것이다. 왕호를 버리는 대신에 황제로부터 절도사 자리를 인정받아 독립 정권으로서의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이납의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도 아버지처럼 지병이 있었다. 792년에 이납이 죽었고,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계승했다.

당나라 11대 황제 헌종(憲宗)은 지방의 군벌(절도사) 세력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807년에 진해(鎭海, 지금의 浙江省 寧波) 절도사 이기(李錡)를 정벌했고, 813년에 위박박(魏博, 지금의 河北省 大名) 절도사 전흥정(田興歸)의 투항을 받아냈으며, 성덕(成德) 절도사 왕승종(王承宗)을 공격했다. 헌종은 815년부터 817년까지 회서(淮西, 지금의 安徽省 북부) 절도사 오원제(吳元濟)를 정벌했는데, 이후 왕승종등 전국의 번진들이 땅을 바치며 조정에 스스로 복종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 유민 후손인 치청(淄淸) 절도사 이사도였다. 818년 헌종은 신라에 지원요청을 한다. 신라는 이에 응한다. 819년 나·당(羅唐) 연합군이 공격하자 치청 왕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사도는 배신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이정기와 그위 후손이 지켜온 치청왕국은 멸망하고 당에게 넘어갔다.

헌종은 안록산·사사명의 난 이후 독립적인 지방의 절도사 군벌을 완전하게 제압해 일시적으로 중흥기를 맞았다. 이를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한다. 하지만 헌종은 지방 군벌을 제압한후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환관 왕수징(王守澄)과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당한 것이다. 향년 43세로, 재위 15년 만이었다. 헌종이 죽자 셋째아들 이항(李恒)이 목종(穆宗)으로 등극한다.

 

 

그해(819년) 11월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엔 이렇게 기록했다.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나라 목종(穆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고 사은품에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당 황제로선 신라의 3만 병력 파견을 반겼을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와 사신들을 접대하고 푸짐하게 선물을 내렸다.

하지만 고구려의 후예가 건설한 치청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고구려인들이 건설한 이 왕국은 ▲제1대 이정기(765~781) ▲제2대 이납(781~792) ▲제3대 이사고(792~806) ▲제4대 이사도(806~819)로 4대를 이어갔다. 고구려 멸망 100년후인 765년부터 819년까지, 고구려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55년간에 걸쳐 산동반도에서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장안의 당 황제와 대립한 것이다.

이정기의 치청왕국은 우리 역사에 정식적으로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 후손이었고, 고구려 유민들이 그와 합세했다는 점에서 굳이 우리 역사에서 외면할 일은 아니다.

 

▲ 장보고 국가표준영정 /장보고 기념관

 

또 주목할 인물은 신라의 산동반도 출병 이후에 서해 해상을 장악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보고(張保臯, ? ~ 846)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으며, 당에서 돌아온 후에 828년 흥덕왕(興德王)에게 청원해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오늘늘 완도에 1만 명의 병사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장보고는 서해와 남해를 장악해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는데, 당시 신라의 해군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앞서 신라가 3만의 군사를 서해 건너 산동반도로 출병한 것이 장보고의 제해권 장악에 밑거름을 형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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