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 칼럼니스트] tvN <뿅뿅 지구오락실2> 첫 회에서 출연자들은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분해야 했는데 ‘미미’는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으로 빙의해야 했다. 문제는 ‘미미’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런데 ‘미미’는 걱정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요약한 영상을 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드라마 요약본을 시청한 ‘미미’는 <스카이캐슬>의 주영쌤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와 같은 유행어도 소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편을 주행하지 않은 ‘미미’는 세계관에 깊이 들어갈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가 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읽으며 그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일본의 젊은 세대가 영화나 드라마를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 기능을 이용해 감상하는 세태를 연구한 책이다.
일본의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와 저자가 강의하는 대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 인터뷰에 기반해 일본 젊은 세대의 콘텐츠 이용 경향을 분석했다. 이용자 관점에서의 트렌드 변화 분석은 물론 일본 사회가 마주한 지금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등 일본의 사회문화 현상에 관한 저자의 통찰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저자는 일본 젊은 세대의 영상 시청에 관한 습관,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이유와 배경을 분석한다.
우선, 영상 작품의 공급 과다를 그 이유로 든다. 이 배경에는 온라인 영상 플랫폼인 OTT가 등장해 많은 콘텐츠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데에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 젊은 세대의 시간 가성비를 지향하는 성향이다. 이는 감상해야 할 작품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일일이 끝까지 볼 수 없으니 빨리 감기나 건너뛰면서 보게 되는 배경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의 증가를 이유로 든다. 이 배경은 일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쉬운 영상을 선호하면서 얕은 감상이 많아진 흐름과도 연결된다.
저자는 이 모든 이유와 배경에 인터넷의 대중화와 관련 기술의 발전이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2000년대부터 온라인을 통한 영상 콘텐츠 관련한 기술적 토양이 쌓여 왔고, 이를 기반으로 OTT 관련 산업이 성장해 왔다고 본다.
무한 경쟁 속 OTT 플랫폼들은 더 많은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거의 무제한의 콘텐츠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할 수밖에 없었고, 유입된 이용자들을 잡아두기 위해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 같은 시청 편의 기능을 더욱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건너뛰게 되는 여백의 순간
물론 대사로 모든 걸 설명하는 영상은 빨리 돌려 봐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자막 서비스를 켜놓고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이나다 도요시는 줄거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감독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여백에 담긴 의미는 놓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글 서두에 언급한 ‘미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영상을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로 보는 행위를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 내를 돌며 작품을 빠르게 훑는 것'으로 비유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물론 작품들이 눈에 들어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영상을 대하는 예전과 지금의 경향을 비교한다. 예전에는 작품을 감상했다면 지금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모습이라면서.
영상을 ‘작품’으로 인식하느냐, ‘콘텐츠’로 인식하느냐는 그 영상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당연히, 영상을 향유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감상’과 ‘소비’라는 태도.
저자는 감상의 목적을 행위 자체라고 해석한다. 작품을 접한 결과, “독립적인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면 감상이다. 반면 소비에는 “실리적인 목적이 수반”된다고 본다. '화제를 따라가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 작품을 보는 게 콘텐츠 소비라는 것.
이렇듯 저자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감상자에서 소비자가 된 모습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곳곳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며 설명한다.
소비의 형태가 달라지는 현대 사회
이나나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마무리 즈음에서 영상 콘텐츠 소비 경향을 ‘리퀴드 소비(liquid consumption)’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회 구조가 기존의 고체(솔리드) 상태, 즉 사회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에 따라 형성된 상태에서 액체(리퀴드) 상태, 즉 사회가 특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는 상태로 변화한다는 견해를 소비 관점으로 해석한 정의이다. 다시 말해 리퀴드 소비는 소비자들의 유동적인 소비 경향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 영상 콘텐츠에 대한 ‘리퀴드 소비’ 특성 중 하나는 콘텐츠의 단명으로 이어지는 소비자의 행동이다. 이는 화제가 된 콘텐츠를 적절한 타이밍에 소비하는 게 중요해진 세태를 반영한다. 그래서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가 중요한 영상 감상 패턴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콘텐츠 소유가 아닌 구독 현상이다. 구독은 소유가 아닌 일정 기간 시청할 권리이다. 챙겨서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나 의무감이 적다. 그러니 작품에 대한 애착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콘텐츠의 탈물질화가 이뤄진다. 콘텐츠 소유보다 구독을 선호하는 현상과 연결되면서 영상이나 음악을 DVD나 CD라는 ‘물질’ 형태로 보관하기보다는 온라인 디지털 서비스를 연결해서 즐기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것.
우리나라에서도 영상을 ‘빨리 감기’나 ‘건너뛰며’ 보는 게 성행하는 듯하다. 그렇게 된 경향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저자 이나다 도요시가 분석한 원인과 배경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읽어본다면 일본뿐 아니라 한국 젊은 세대들이 콘텐츠를 대하는 세태와 경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영상이 인기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전개가 흥미롭지 않으면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면 될 정도로 콘텐츠가 넘치는 바다에 살고도 있다. 그런데 빨리 돌리거나 건너뛰면서 놓치는 것 또한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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