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의 세상보기] 울렁울렁 울릉도 여행기  
상태바
[나은주의 세상보기] 울렁울렁 울릉도 여행기  
  • 나은주 글쓰기 선생
  • 승인 2023.05.21 20:19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은주 칼럼니스트
나은주 칼럼니스트

[나은주 글쓰기 선생] 비바람이 대수랴 싶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두 아들과의 여행인데. 아이들이 성장하면 꼭 한번은 아이들만 데리고 셋이서 여행을 하고 싶었다. 가족 완전체가 좋을 때도 있지만, 이번 여행은 엄마와 아들이 함께하는 여행으로 정했다. 그러면 한 인간으로 성장해온 내 인생과 두 아이를 등대 삼아 살아온 엄마로서의 인생이 정리되고, 지금 서 있는 내 자리가 어디쯤인지 어렴풋이 보일 것 같았다. 

며칠 안 되는 시간을 얻어 동남아 몇 군데를 기웃거리기도 했으나 최종 여행 선택지는 울릉도. 국내 여행지라서 오가는 부담도 덜하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니 공간 분리가 되어 정신적으로도 자유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울릉도는 모두가 처음이라 어떤 풍경과 만나게 될지 설렜다. 날씨 예보를 보며 울릉도에 들어가면 제때 못 나올 수도 있다고 걱정스레 말하는 남편 말에 몰래 콧방귀를 뀌고 배낭을 꾸렸다. 못 나오면 말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반 차를 내고 나온 작은아들과 동탄에서 올라온 큰아들 차를 타고 묵호로 향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서울을 빠져나가 묵호에 도착했을 때 어둠에 잠긴 도시는 적요했다. 미리 검색하고 찾아간 음식점은 일찌감치 문을 닫는 중이었다. 10여 분 돌아다닌 끝에 소박한 음식점 하나를 찾아냈다. 도톰한 삼겹살이 쫄깃하고 맛있는 집이었다. 푸짐하게 내놓은 상추와 청겨자, 당귀잎 같은 쌈 채소가 입과 몸을 파릇하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두 아들은 소주로, 나는 맥주로 건배를 하고 우리의 여행을 자축했다. 딸만 셋 있다는 주인아주머니가 든든해 좋겠다며 부드러운 계란찜을 내주셨다. 의례적인 인사였겠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10분에 울릉행 배가 뜰 예정이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우니 방이 꽉 찼다. 2870g, 3450g으로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어느새 우람한 청년이 되어 좌청룡 우백호의 대형으로 잠이 든다. 품에 안기도 조심스럽던 작은 아기들의 모습이 겹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천식, 폐렴에 장염은 물론 열이 나면 경기까지 일으켜 걸핏하면 병원으로 뛰게 하던 큰아이, 다리 골절, 팔 골절로 연중행사 깁스를 하던 개구쟁이 작은아이. 다리 하나가 대들보처럼 커진 아이들은 코까지 골며 잘도 잔다. 그렇지만 내 눈엔 여전히 덩치 큰 어린아이들이다.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울릉행 페리호에 올랐다. 울릉도까진 3시간 30분 거리. 미리 멀미약 패치를 귀밑에 붙여 두어선지 크게 울렁거리진 않았다.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도 서넛 보였다. 밖에 나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모든 출입문이 닫혀 있었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TV에 눈을 두기도 하다 보니 어느덧 도동항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점처럼 작게 보이던 울릉도가 줌으로 쭈욱 잡아당기듯 점점 크게 다가왔다. 해안가 절벽 사이로 난 해안 트레킹 길이 띠를 두른 듯 이어져 있었다. 얼른 걸어보고 싶어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중앙차선도 없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는 울릉도에서 렌트카 운전대를 잡은 큰아들은 살짝 긴장을 하는 듯했다. 차창을 활짝 열고 싱그런 초목의 향과 바다 내음 어우러진 울릉도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마음도 덩달아 부풀었다. 

울릉도 전경. 사진=나은주
울릉도 전경. 사진=나은주

첫날, 우리는 가능한 많이 걷기로 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폭풍우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코스는 나리분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전망대를 지나니 드넓은 들판이 짠하고 나타난다. 지리 교과서에서나 읽었던 나리분지는 울릉도 유일의 평야 지대이다. 너른 밭에는 명이나물, 더덕 등이 자라고 있었다. 거대한 품처럼 분지를 둘러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행자의 마음까지 안온하게 품어 주었다.  

식당에 들어설 무렵 바람이 제법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식당 앞 텃밭까지 빼곡히 들어찬 명이나물들이 초록 물결을 일으키며 춤을 추었다. 산채 정식을 주문했는데 나물만 16가지가 나오고 오징어 더덕전, 엉겅퀴 시래기국이 나와 커다란 식탁이 넘칠 지경이었다. 삼나물 회무침은 상큼하면서도 아닥아닥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명이나물, 삼부추, 부지깽이나물, 취나물 등 향긋 쌉싸름한 맛이 진해 오감이 화들짝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맑으면서도 달착지근하게 넘어가는 씨껍데기 막걸리는 나물 반찬을 안주 삼아 먹어도 순하게 잘 어울렸다. 큰아들은 운전을 해야 해서 작은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잔을 채웠다. 참 맛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와 향한 곳은 관음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한쪽은 절벽에 가까운 봉우리요 반대쪽은 망망대해 짙푸른 바다라 탄성이 절로 나온다. 5분이 멀다 하고 나타나는 바닷속 기암괴석들은 자연의 신묘한 마술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섬목터널을 빠져나가자 듬직하게 엎드려 있는 관음도 입구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연륙교를 건넜다. 50m 높이의 관음도 등성이까지 가는 길은 동백 터널이었다.  

“엄니, 이쪽으로 가쥬? 다리도 안 좋으신디.” 작은애가 비스듬한 산책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른쪽으로 죽도가 보였다. 머리띠 모양으로 관음도를 둘러싼 산책로를 걷다 보니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 풍경이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바다에 넋을 빼앗긴 채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순간 저 끝까지 능선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곡선의 오솔길. 두 아들과 산책로를 걷다 보니 조막만 한 손을 양쪽으로 잡고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뜨뜻해졌다.   

도동 저동 옛길을 가다 중간에 행남 해안길을 걸으면 기가 막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곳은 반드시 걷자고 했다. 옛길로 들어서자 양옆으로 하얀 벌사상자꽃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하늘 일렁이는 꽃길 사이로 걸어 올라가니 숨이 차고 땀이 났다. 언덕 위에 마침 알맞게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았다. 저동항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 색색깔의 지붕들과 정박해 있는 어선들, 방파제와 푸른 바다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오래전 행남 마을 주민들이 도동이나 저동을 갈 때 걸어다니 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단다. 그런데 오르락내리락 걷기가 만만치 않았다. 헬스장에서 PT를 빡세게 받아 허벅지가 당긴다는 큰아들은 ‘아고’ 소리를 내며 뒤처지기 일쑤였다. 작은아들은 앞서 걸으며 미끄러우니 조심해라, 급경사니까 집중해라, 조금만 가면 인가가 나올 거라며 엄마와 형을 챙겼다. 소나무, 대나무 숲길을 지나 드디어 해안길로 빠지는 곳까지 갔는데……. 그토록 기대한 해안길은 출입 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실망. 자갈이 깔려 있는 해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다시 출발했다. 등산과 트레킹의 묘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옛길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그 사이 다음날 독도행 배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내륙으로 들어가는 배들도 모두 출항 금지였다. 독도를 봐야 울릉도를 본 것이라는 말은 있지만 하늘의 조화를 어쩌랴. 그 핑계로 나중에 또 오면 되지 뭐. 대신 독도새우 회를 드시라며 아이들은 제법 근사한 횟집으로 안내했다. 탱글하면서도 달큰한 새우회를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가격표가 자꾸 눈에 들어왔지만 일부러 외면을 했다. 아들들하고 왔으니 그러지 말자 하면서. 얼큰한 매운탕도 입에 맞았다.  

“낼부터 우린 고립된규. 바람 불고 비올 땐 낙석이 위험해서 차 끌고 나가지 말라던데? 뭐하지?” 그래서 우린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각자 먹고 싶은 것들을 고르고 화투도 하나 샀다. 긴 시간 보내는 데는 화투만 한 것이 없잖은가? 배가 안 뜨거나 말거나 섬에서의 고립이 은근 재미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과 긴 시간 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벌써 즐거워졌다.  

자고 깨고, 따뜻한 밥 먹고, 햇빛과 바람 냄새나는 옷 입고, 학원 정하는 일까지, 엄마 손이  없으면 안 되던 세월이 20년이었다. 그러다 대학엘 가고, 공부하고 연애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군대 다녀오고, 취업하고……. 얼굴 마주하고 앉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한 달에 두어 시간이나 될까? 큰애는 따로 살아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다. 배꼽이 아니었다면 서로 탯줄로 연결된 생명이었다는 것을 잊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아들은 각자 자기가 엄마한테 해주고 싶은, 자신있는 요리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다행히 그다음 날 오전엔 비만 내릴 뿐 바람이 세차진 않았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저동항으로 홍따밥을 먹으러 갔다. 홍합과 따개비를 넣고 지은 밥이 어찌나 꼬들꼬들하고 감칠맛이 있던지 이른 아침인데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슴슴한 미역국도 맛있었다. 마트에 가서 약소 등심과 쌈 채소 등을 사고 오징어 내장탕 거리, 오삼불고기 거리도 샀다. 아이들이 선택한 재료들이었다.  

회색빛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돌아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점 500 고스톱을 쳤다. 뭔 서비스 패도 알려 주면서 아들 녀석들은 봐주는 것 없이 치열하게 화투장을 던졌다. 그러나 첫날 경기는 나의 승. 큰애한테 3000원, 작은애한테 19000원을 땄다. 잠시 쉬는 동안 큰애가 오삼불고기를 만들어 점심을 차렸다. 비바람 부는 바다를 옆에 두고 햇반으로 근사한 식사를 했다.  

“우리 낮잠이란 걸 자볼까유?” 작은아이 제안에 불을 끄고 누워 우리는 한 시간쯤 달디단 낮잠을 잤다. “회사일 하다 보니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편하게 낮잠을 잔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회사를 다니는 큰아이 말이 짠해서 마음이 아렸다. 밥벌이의 노역은 평화로운 쉼마저도 앗아간다. 실은 나도 그랬다. 하루 쉬는 토요일엔 꼭 무슨 일은 만들어 돌아다니곤 했다. 그런데, 동해 바다에 떠 있는 섬 울릉도까지 와 셋이서 낮잠이란 걸 잔 것이다. 참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가족. 

저녁이 되면서 빗줄기는 세어지고,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은 파도를 따라 널뛰기를 했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 배는 출항 금지. 사흘 후에 뜬다 해도 못 나간 순서대로 앞엣사람부터 승선하게 된다는 문자가 여행사로부터 왔다. 하루 이틀 쉬는 거야 괜찮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막연한 기약은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모레 새벽 5시에 포항으로 출발하는 크루즈와 오후 3시 30분에 후포로 출항하는 크루즈가 있다는 연락이 연이어 왔다. 승객 1200명을 태울 정도의 크루즈 선은 웬만한 일기라면 출항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예약한 손님들이 있을 거니 이 난리에 한두 개 표가 있다 한들 우리에게 차례가 올까? 

작은애가 구워 주는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약소등심구이를 먹으며 어린 시절 이야기,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절 이야기로 시간 여행을 했다.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옛날이야기를 할 때가 오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빗줄기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반주는 의식의 자유를 선물했다. 내 어깨에 올려진 여러 개의 역할이 그 순간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술을 마시는 이유 아니겠는가. “우리 엄니, 그동안 살면서 큰 어려움도 능히 이겨 내셨는디 또 희망이 생기지 않겄슈?” 작은아이 말에 맞다 맞다 맞장구를 치며 잠이 들었다. 

하늘의 물과 바다의 물이 섞이느라 세상은 흠뻑 젖어 요동을 쳤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가라고 남편이 알려준 울릉도 독도 해양 연구기지 직원을 찾아갔다. 원래 크루즈 티켓은 울릉도민을 위해 30장씩의 여분을 준비하는데 만약 남는 표가 있으면 대기자들에게 배부하니 일단 크루즈 터미널에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적체된 사람들이 있어 불가능할 것 같다며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비오는 울릉도. 우리 모두 발이 묶였다. 사진=나은주
비오는 울릉도. 배는 뜨지 않고 타지로 나가려던 사람들은 발이 묶였다. 사진=나은주

큰아들은 구경이라도 가자면서 크루즈 터미널로 차를 몰았다. 내일 새벽 5시 배라는데 설마 누가 있을까? 그런데 세상에, 놀랍게도 소지품 대열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합실에서 밤을 지샜는지 의자에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도 서둘러 캐리어를 갖다 놓았는데 눈대중으로 대략 스물두 번째쯤. 소지품 하나당 한 사람씩만 타야 그나마 쬐금 희망이 있을 텐데 우리 식구가 셋인 것처럼 그네들도 다 일행이 있을 것이다. 계산해 보지 않아도 크루즈 승선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운 좋으면 오후 배는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일단 철수. 우리는 터미널이 있는 사동항 근처에 남은 방이 있는지 검색했다. 내일 새벽 크루즈를 못 탄다 해도 오후 배도 여기서 출항할 것 같으니 그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숙소는 항구의 맨 끝 쪽으로, 겨우 구했다. 일단은 쉬다가 티켓을 판매하는 새벽 2시에 맞춰 나가보자고 했다. 도동항으로 가 따개비 칼국수를 먹고 느긋하게 돌아와 또 늘어지게 꿀잠. 혹시 몰라 렌트카도 반납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저녁은 치맥으로 가볍게 때우며 2차 고스톱 경기에 돌입했다. 역시 점 500은 크다. 나는 큰아들에게 25000원을 잃었다. 작은애한테도 만 얼마를 주었다. 유쾌한 패배였다. 맥주를 마시며 큰애는 동생 직장 걱정을 했다. 작은애가 안정된 직장을 다니길 바라는 건 엄마나 형이나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엄니, 아부지 건강이유. 건강하셔야 이쁜 손주도 보고 여행도 다니시지.” 두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했다. 어느새 내가 아이들이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으면서도 보호를 받는 기분이 은근 좋기도 했다. 연애 얘기, 결혼 얘기하다 보니 밤 10시가 넘어갔다.  

큰아들은 터미널에 나가 상황을 살피다가 매표가 시작되는 2시 무렵, 가능성이 보이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붐비는 대합실 풍경을 사진 찍어 보내며 낼 아침은 그 근처에 있는 몽돌식당에 가서 먹자고 했다. 마치 표 구하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오후 티켓 획득을 위해 경험치를 쌓는 연습 게임. 아슴아슴 잠이 들 무렵 전화벨이 울려 일어나니 새벽 1시였다. 직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보란다. 작은애와 나는 꿰입고 밖으로 나섰다. 환하게 불을 밝힌 멋진 자태의 크루즈가 손짓을 했다. “저거 타고 싶네.” 작은애가 말했다. 

기상악화로 인한 울릉도 부두의 진풍경. 한 밤중부터 새벽까지 혹시나 배가 뜰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울릉도를 찾은 관광객들은 짐으로 줄을 대신하고 여객터미널에서 쪽잠을 청했다.  사진=나은주

쉬지 못한 큰애는 벌써 꺼칠했다. “어려울 거 같긴 하쥬?”하며 웃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직원은 현재 정황상 대기자가 표를 얻기는 어렵다며 그래도 이름을 적어두라고 했다. 새벽 2시가 넘자 큰애는 우리 등을 떠밀었다. 자기는 더 남아 남은 표가 어떻게 배분되는지 살펴보겠다고 했다. 그래야 오후 표 구할 때 요령이 생길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내일 오전에 푹 자면 되겠지 싶어 더 말리지 않고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육지로 들어가는 게 제1의 과제가 되어 버렸다. 서울로, 묵호로 승용차를 가지러 가는 건 나중 문제였다. 

보일러를 따뜻하게 올리고 또 잠을 청했다. 갑자기 눈이 떠져 톡을 보니 4시 30분. 얘가 얼마나 힘들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 톡이 후두둑 들어왔다. ‘대기해요, 앞에 짐 네 개 남음, 미리 출발하면 좋겠지만 어렵겠지?’ 그때가 4시 39분. 나는 황급히 작은애를 깨웠다. “수영아, 나오래!” 정신없이 소지품들을 배낭을 처박았다. ‘뛰면 10분 안에 올 수 있나? 왠지 될 거 같음.’ 그게 4시 41분. ‘오고 있어요? 끊었다! 뛰어요!!!’ 으악, 4시 44분!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5시 배인데 어떡하라고! 작은애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손에 들고 큰애 배낭까지 멘 채 앞서 뛰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최대한 달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숨이 차서 목과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엄마, 빨리!‘” 작은애가 거꾸로 뛰어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짐을 달라고 했다. 더 들을 손도 없으면서. 시계를 보니 53분. 절망이다. 배는 저 멀리에 있는데. “가! 너라도 가서 사정해 봐. 엄마 저기 온다고!” 숨이 차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작은아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그때,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자동차가 온다. 나는 돌아서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저걸 놓치면 끝이다! 근데, 지나쳐 가던 차가 멈춰 섰다. 뛰어가 보니 해양경찰 차였다. “저 저 배 타야 해요. 5시 출항!” 나는 가슴을 누르며 외쳤다. “어서 타세요.” 차에 올라 나는 뛰어가는 아들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제 아들!” 경찰은 속도를 내어 아들 옆에 차를 세웠다. “타세요!” 순식간에 크루즈 선착장에 도착했다. 58분! 해양경찰 차를 타고 오리라 생각지도 못한 큰아들은 인도 쪽만 바라보며 동동거리고 있었다. “수민아!” 해양경찰대원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배로 연결된 승선 통로를 향해 또 뛰었다. 아, 드디어 출항. 

 이럴 수가! 우리 셋은 웃었다. 드라마 한 편 찍은 듯하다. 1200명이 탄다는 크루즈인데 우리는 자유석으로 추가 승선한 10명으로 운 좋은 1210번째 승객인 셈이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거 완전히 기적이유!” 그래, 기적이 별거냐? 이런 게 기적이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어둠이 걷히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울릉도와 인사는 해야지?” 우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갑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울릉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속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헤어지는 연인처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아쉬운 마음이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게. 안녕, 울릉도!  

줌 아웃을 하듯 울릉도가 점점 작게 뒤로 물러났다.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파도가 넘실대는 수평선 끝에서 둥실,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동해 바다에서 새로운 하루를 끌어올리고 있는 태양. 일출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새벽 5시 포항으로 떠나는 울릉크루즈호가 불빛을 환희 비추고 있다. 사진=나은주

울릉도에서 포항까지 6시간 30분. 아이들은 의자를 붙여 놓고 잠이 들었다. 아침 태양은 깜짝 선물이었다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를 보다 아이들을 보다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여행은 마치 인생 같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울릉도 여행처럼. 때론 잔잔했다가 때론 폭풍우가 몰아치고.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쳐올 땐 파도를 따라 배가 출렁이듯 시간에 나를 맡겨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바다는 잔잔해지리라. 내 인생의 등대 같은 아이들…… 살면서 이렇게 함께할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남게 될까?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마음이 먹먹해진다. 청회색으로 살아 펄떡이는 바다를 보며 기도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언제고 힘들 때 아이들이 돌아와 쉴 수 있는 너른 품의 엄마가 되게 해달라고……. 된장찌개, 김치찌개에 밥 한 사발 고봉으로 차려내어 아이들이 힘낼 수 있게 해주는 엄마가 돠게 해달라고……. 그만큼만 건강하기를. 

포항은 걷기가 힘들 만큼 비바람이 심했다. 일요일이라 서울 가는 기차, 버스는 완전 매진. 긴급 문자를 받은 남편이 새벽 운전을 하고 와 우리를 픽업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무려 9시간 운전을 한 남편 덕에 우린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큰아들은 다음날 묵호로 가 차를 끌고 오는 것으로 우리의 울릉도 여행을 마무리했다. 행복한 고립과 탈출이었다.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6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반달 2023-05-23 16:22:51
파란만장한 여행기네요.
"여행은 마치 인생과 같다." 라는 표현에 동감합니다.
아이들과 멋진 추억 계속 쌓아가시고,
교감이 되는 글 많이 올려주세요.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저를 뒤돌아보게 되네요.
감명적인 글 잘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민민연 2023-05-22 16:54:15
읽는 내내 내 숨이 멎는 느낌이네요^^
좌청룡 우백호 든든한 아들들과 한 편의 드라마같은 울릉도 여행기 ㅎㅎ
진심 행복한 시간 여행과 휴식같은 여행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늘 재미있고 감동되는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raplan22 2023-05-22 13:48:52
긴장감 있게 구성된 여행 다큐 한 편 보는 것 같이 몰입해서 읽었네요. 사회생활하는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어 운전도 하고 요리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셨겠어요.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푸른숲 2023-05-21 22:19:15
글 읽는 내가 다 숨이 찰 정도로 긴박하고 긴장되는 살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은주씨 글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저리 표현들이 수려할까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드라마틱한 울릉도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꿈그리기 2023-05-21 21:57:34
좌충우돌 여행 참 잼나요. 자식들이 아무리 나일 많이 먹어도 언제나 자식은 자식일 뿐이라는 ... 다음엔 온 가족이 함께 여행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