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㉑ 아현동은 마포구인데 북아현동은 왜 서대문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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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㉑ 아현동은 마포구인데 북아현동은 왜 서대문구일까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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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아현동과 북아현동은 한 뿌리였습니다. 조선시대까지는 한성부 아현계(阿峴契)에 속한 같은 동리였지요. 

하지만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아현계 일대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남부 지역이 용강면 아현리로, 북부 지역은 연희면 아현북리로 갈라졌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를 거의 그대로 적용해 마포구 아현동과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나뉘게 되었지요.

아현(阿峴)이라는 지명은 애오개의 한자어입니다. 애오개는 애고개가 변형된 것으로 대현과 만리현 사이의 작은(아이)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알려졌습니다. 혹은 아이 시신이 이 고개를 넘어 나가게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도 하지요.

아현(阿峴)은 애오개의 한자어

아이 시신과 관련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소의문과 광희문을 통해 시신을 성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나왔습니다. 소의문, 즉 서소문을 나서면 아현 고개가 위치했는데 이 고개에 아이 시신을 매장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해방 이후 아현동 산 7번지(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된 아현시장 인근)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아이가 묻힌 것으로 보이는 작은 무덤인 아총(兒塚)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 아총들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현동 언덕에 이름 없는 백성들의 무덤이 많았던 건 분명합니다.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서울시와 건축 관계자들의 회의 모습. 사진제공=서울시역사아카이브

그 아현동 언덕배기에 도시 빈민들이 터 닦고 살았습니다. 특히 1930년대에 경성에 토막민이 늘어나자 조선총독부는 도시미화 차원에서 도심 바깥에 토막민 집단 수용지를 건립했는데 아현동이 그곳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이 토막민으로 불린 이유는 토막집에 살아서였습니다. 토막집은 벽과 지붕을 갖춘 주택 형태가 아니라 구덩이를 판 후 거적 등으로 하늘을 가린 형태의 주거 공간을 말하지요.

한편, 한국 전쟁 후 서울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빈터마다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아현동과 북아현동의 언덕 자락에도 서민들의 주거 공간이 넓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시에 판잣집들이 철거된 적도, 선거 때 불량주택 일부가 양성화된 적도 있지요.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마포대로와 신촌로가 정비되면서 이 일대 인구가 더욱 늘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서민 주거 공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현동 주택가는 어쩌면 아카데미영화제 수상작에 영감을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현동의 어느 이면도로에 ‘돼지슈퍼’라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영화 <기생충>에서 박서준이 최우식에게 과외 자리를 물려주는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촬영한 장소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슈퍼 근처 골목에 자리한 주택가에서 영화 <기생충>의 송강호 가족이 살았던 동네의 분위기가 풍기는 듯합니다. 

아현동 돼지슈퍼. 영화 <기생충>에 나왔던 장소다. 사진=강대호

예전에 북아현3동으로 불렸던 충현동의 고지대에도 흥미로운 이름의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금화장오거리 정류장인데요, 금화장은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주택단지 이름입니다.

충현동 고갯길 한복판에 자리한 금화장오거리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는 3대 주택지가 있었는데 후암동의 학강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 주택지, 그리고 북아현동의 금화장 주택지를 말하지요.

금화라는 이름은 인근의 금화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또한 금화산 자락에서 화초를 팔던 금화원에서 정원의 이미지를 따왔다고도 하네요. 

일본에서는 주택지를 개발할 때 유원지나 별장지에서 콘셉트를 가져오기도 했기 때문에 주택지 명칭에 유원지의 원(園)이나 별장지의 장(莊)을 넣는 경우가 많았는데 금화장(金華莊)도 그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1930년 <경성일보>에 실린 분양 안내 기사를 참고하면, 금화산에 둘러싸이고 금화원이 있어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고지대라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동네는 도심에서 밀려 나온 서민들이 터 잡고 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 자료를 보면 충정로에서 이화여대 방향의 고지대, 지금의 북아현동 일대에 일제 강점기부터 토막집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금화장 주택지 조성 당시 개발지 인근의 토막민들은 지금의 아현동이나 홍제동으로 쫓겨났다고 하네요.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에서 행인들에게 금화장에 관해서 물어보니 대체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몇몇만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곳이고 아직 당시의 문화주택이 남아있는 데가 있다며 골목 여러 곳을 가리켰지요. 

금화장 주택지. 금화장은 일제 강점기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다. 사진=강대호

그 골목들을 둘러보니 일본풍 주택 몇 채와 높게 쌓은 축대에서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들어선 다세대주택들도 예전에는 일본풍 주택이었겠지요. 금화산 방향을 올려다보니 경사지를 따라 주택가가 들어섰고 산 정상 부근에는 아파트단지가 보였습니다. 

1960년대 말 서울시는 주택 부족 현상과 불량주택 난립 현상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 곳곳에 시민아파트를 건설했습니다. 금화산 자락에도 금화시민아파트가 들어섰지요. 하지만 안전 문제로 단계적으로 철거하고 2000년대 초반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단지를 건축하게 된 거죠.

반백년 아현동과 함께 한 목욕탕 '행화탕'

한편, 아현동에는 주민들이 장례식을 치러준 목욕탕이 있습니다. 1958년에 문을 연 행화탕이 그곳입니다. 

아현동 주민들이 즐겨 찾던 행화탕은 2008년에 폐업했습니다. 그곳을 2016년 5월부터 2021년 5월까지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행화탕이 속한 동네는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행화탕도, 목욕탕과 이웃한 한옥들도 헐릴 운명이었지요. 

그래서 복합문화공간 운영을 마친 2021년 5월에 행화탕의 장례가 삼일장으로 열렸습니다. 행화탕을 이용했던 주민들은 물론 사라져가는 도시의 흔적을 보기 위해 많은 조문객이 방문했습니다. 

저는 허물어져 사라질 운명의 행화탕과 목욕탕 골목의 한옥들 모습을, 2021년 가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하지만 2023년 5월 현재는, 1958년부터 아현동 주민들이 이용해 왔던 목욕탕인 행화탕도 그 골목길에 있었던 한옥들도 모두 헐려 차단막이 처져 있습니다. 

아현동과 북아현동은 한때 같은 동리였다는 걸 보여주듯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아파트단지로 변한 동네가 있는가 하면 일제 시기의 건축물이나 한국 전쟁 후 서민들이 살았던 주거 공간의 흔적이 남은 골목들도 있지요. 

아현동과 북아현동은 도시가 변화하는 모습을,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곳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2021년 11월 아현동 행화탕. 목욕탕에 철거 안내장이 붙어 있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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