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에서 한옥마을 하면 어디가 떠오르나요? 아마도 북촌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텐데요 북촌에서도 가회동 일대에 한옥이 많이 몰려 있어서일 겁니다. 그 한옥들을 보면 유서가 깊은 집이라 생각하겠지만 북촌 일대의 한옥들은 대체로 지어진 지 100년이 안 되었습니다.
물론 북촌은 궁궐 바로 옆에 자리해 왕족들과 고관들의 집들이 많이 들어선 한양 최고의 주거지였습니다. 그런데 큰 집들이 몰려 있던 북촌 일대를 1920년대부터 집장사로 불렸던 건축업자들이 대지를 작게 나누어 주택단지로 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북촌 일대에서 볼 수 있는 한옥들은 일제강점기에 건축업자들에 의해 지어진 집인 거죠. 그 건축업자 중에 정세권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건축왕, 정세권
정세권(鄭世權)은 일제강점기에 북촌 일대에서 건축사업을 한 사업가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건축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독립운동에도 많은 돈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으로 진출하자 정세권 등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이 지역에 민간 주택 건설 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 일본인 개발업자들은 주로 문화주택지 개발에, 조선인 개발업자들은 주로 한옥단지 개발에 나섰지요. 결과적으로 조선인들의 거주 지역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는 상황을 막는 효과를 불러왔다고 합니다.
춘원 이광수는 1936년 <삼천리>에 발표한 글에서 정세권을 “집장사로 청부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하여 항상 연구”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날림을 하는 보통의 집장사”와 다르다고 평했습니다.
그런 정세권은 개발 과정에서 지배층이나 부자들이 살던 고래등 같은 전통 한옥을 여러 필지로 쪼개는 도시형 한옥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렇게 설계된 한옥은 구조를 네모 안에 모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했습니다. 그래서 도시한옥 혹은 개량한옥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정세권을 연구한 문헌들을 보면 그는 우리 주택의 개량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개발된 지역은 북촌의 가회동은 물론 익선동, 계동과 재동, 그리고 창신동 일대에 산재해 있는데요 당시 한옥의 건축 비용이 문화주택과 같은 외래 주택의 건설비용보다 저렴해 대량 공급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은 사진 촬영 명소로, 익선동 한옥마을은 한옥을 개조한 아기자기한 가게들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북촌의 한옥마을은 현재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동네이고, 익선동 또한 일부 한옥에서 사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마을 곳곳에 관광객들의 당부를 요청하는 안내문을 볼 수 있지요.
지난 글에서 소개한 기자촌에서 북한산 입구로 가다 보면 다소 이채로운 동네가 나타납니다. 일명 ‘은평 한옥마을’입니다. 서울 종로의 북촌이나 익선동에만 한옥마을이 있는 게 아니라 구파발의 북한산 자락에도 한옥마을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한옥마을로 떠오른 구파발
이곳은 은평뉴타운으로 개발된 지역으로 SH공사가 공급한 한옥 156필지로 구성됐습니다. 북촌이나 익선동처럼 지은 지 수십 년 된 한옥이 아니라 2012년 이후에 새로 신축한 한옥들이지요. 현대 감각에 맞춰 새로 설계한 한옥도 있지만 삼남 지역,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의 조선 시대 기와집을 본뜬 한옥이 대부분이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비슷한 면적과 구조의 집들이 모여 있는 북촌의 한옥과는 집 크기부터 다르고 집 모양과 구조도 모두 다릅니다.
은평 한옥마을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뒷마당으로 삼고 있는 모습입니다. 대자연과 한옥마을은 잘 어울리는 듯도 하지만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평평하게 정리된 택지와 반듯하게 뻗은 골목길에 줄지어 선 한옥들이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해 들어선 전통 한옥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요.
은평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얼핏 관광지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마을의 한옥들에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은평뉴타운으로 개발된 동네이니까요. 그런데 거주 공간 사이 곳곳에 들어선 카페 등 한옥을 이용한 가게들을 보면 외부 사람들은 이 마을을 관광지로 여기는 듯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 마당에는 은평뉴타운 개발지 곳곳에서 옮긴 묘지 석물들이 서 있고 유구 발굴지가 재현되어 있습니다. 은평뉴타운이 들어선 지역에는 신라 시대부터 근대까지 조성된 묘지가 많았는데 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무덤만 5000 기가 넘는다고 하네요.
왜 이 지역에 이토록 많은 무덤이 있었을까요?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도성 밖 십 리인 성저십리 안 영역에 무덤을 쓰는 것을 법으로 금했습니다. 즉, 매장이 금지된 금장(禁葬)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금장 지역을 벗어난 곳이 바로 경기도 고양에 속한 진관내리와 진관외리, 지금의 은평뉴타운이 들어선 은평구 진관동이었습니다. 도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 매장지로 많이 이용되었지요.
이 지역에 산재했던 5000여 기의 무덤들은 뉴타운으로 개발될 때 법으로 규정한 발굴 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발 주체들이 역사에 이름이 남기지 못한 평민의 무덤들을 개발의 방해물로 취급하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지요.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의 관련 전시물도 민초들 보다는 양반 문화 위주로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요.
은평 한옥마을은 북한산 주변 풍경을 이채롭게 만드는 곳으로 자리 잡을 듯합니다. 이 지역이 오래전부터 한양 사람들의 매장지였던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었듯 은평 한옥마을은 2020년대 서울의 주거 문화 중 한 사례를 엿볼 수 있는 풍경으로 역사에 남지 않을까요.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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