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의 세상보기] 풍선껌 불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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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의 세상보기] 풍선껌 불어 보세요 
  • 나은주 글쓰기 선생
  • 승인 2023.04.28 17:1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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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 글쓰기 선생
나은주 칼럼니스트

[나은주 글쓰기 선생]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안녕! 고생 많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나가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끝. 아이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순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두 팔이 힘없이 의자 아래로 툭 떨어진다. 몸살이 올 때처럼 얼굴에 동통이 느껴지고 눈 밑이 파르르 떨린다.

머릿속은 작동이 멈춘 듯 멍하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책상 한켠에 컵이 있는데도 손은 도무지 움직일 의지가 없다. 속이 울렁거린다. 고개를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비어 버린 내 몸으로 조금씩 생기가 차오르길 기다린다.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는 오후 12시 30분부터 10시까지 쉬지 않고 수업을 했다.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고 시간표를 짜는 바람에 아이들 글 쓰는 시간을 빼면 대략 8시간은 내내 떠든 셈이다. 조금 일찍 오는 다음 타임 아이들과 글쓰기 마무리하는 아이들이 섞여 강의실과 위층 다락방은 모두 아이들 차지가 되어 버렸다.

짬짬이 초스피드로 때우는 저녁 간식도 오늘은 건너뛰고 말았다. 그만큼 정신없는 날이었다.  

책을 읽고 온 아이들이 낱말이나 내용은 제대로 이해했는지, 주제는 파악했는지, 주제와 관련해서 자신이나 사회의 문제 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를 하며 수업을 이끄는 게 내 일이다. 그리고 토론이 끝나면 자기 생각을 글로 쓰게 한다.

아이들이 정독을 하고 수업 준비를 잘해올 땐 하루 12시간이라도 신나게 수업을 할 수 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척척 대답을 하는 씩씩한 목소리가 내겐 밥이고 보약이다. 세상을 밝히는 불씨처럼 톡톡 터지는 생동감이 손바닥만 한 독서교실을 가득 채우면 어느새 나도 그 에너지로 충전되곤 한다. 

그러나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 읽었는데도 뭔 내용인지 모른다고 할 땐 맥이 빠진다. “꼼꼼히 정독을 해야지.”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인들 그러고 싶지 않았겠는가? 학교 수업, 영수 학원과 숙제에 치이고, 겨우 숙제를 끝내면 유튜브도 봐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는데 언감생심 책이 손에 잡히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책 속의 깊고 넓은 세계를 느끼게 하고 싶다. 평생 친구가 되어 주고 보물이 되어 줄 책을 아이 손에 쥐어 주고 싶다. 아직은 무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므로 어르고 달래서라도 책을 읽게 해야 한다.  

자라면서 나도 그랬지만, 선생님 바람대로 되지 않는 일도 태반이다. 아이들의 시선과 표정, 자세, 반응, 필기하는 모습을 살피며 내 말이 그대로 튕겨져 나오는지, 절반은 이해했는지, 온전히 다 받아들여지는지 예리한 촉수로 감지해 내려 한다.

많아야 너댓 명 아이들이 모인 그룹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반응이 다른지. 나는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어떤 아이는 열심히 듣고, 어떤 아이는 시계를 흘끔거리고, 어떤 아이는 벽에 붙은 자료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다. 한 녀석이 살그머니 과자를 꺼내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한 아이는 “쟤 혼자 뭐 먹어요 선생님!”하고 이르고. 참 난감한 상황 속출이다.  

가끔은 용납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으로 속을 끓게 하는 아이도 있다. 그럴 때도 절대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쓴다. 

종일 떠든 내 말들은 누구의 마음에 들어가 앉았을까? 아니면,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까? 

사진은 이 글과 직접적 연관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이 글과 직접적 연관없음. 사진=연합뉴스

천천히 눈을 뜬다. 조금 정신이 나는 거 같았다. 그래, 어서 정리하고 집 가자. 나는 미지근해져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버석거리던 몸에 물기가 돌았다. 책상 위엔 수북이 쌓여 있는 하루의 흔적들. 나는 한 권 한 권 책을 포개어 가지런히 책꽂이에 꽂았다. 흩어져 있던 교재들도 책상 한켠에 시루떡 쌓듯 단정히 정리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쓴 글들을 학년별로 분류했다. 동글동글 귀여운 사랑체 글씨, 가지런하고 강건한 선비체 글씨, 암호 해독을 하듯 들여다봐야 하는 사인체 글씨, 멋대로 휘갈겨 쓴 자유체 글씨들. 글씨만 봐도 누구의 것인지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종알종알 아이들이 목소리가 들릴까 봐 첨삭은 집에 가서 하기로 했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시 한 편.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껌> 

껌을 씹다 생긴 풍선처럼 / 기대를 담은 마음이 커진다 / 그러다 / 풍선이 터지듯 / 기대도 펑 터진다 / 그리고 깨닫는다 / 아이 셔. 

밝은 시유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풍선껌 씹어 보세요. 그럼 기분 좋아져요. 아, 그래 볼까? 서랍을 열었다. 아이들 글 쓸 때, 졸립다고 할 때, 뭐 먹고 싶다고 할 때 주는 풍선껌이 서랍 한가득이다. 말하자면 기분 전환용.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쯤 쉬지 않고 수업하는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데 줄 건 없고. 그때 쯤 풍선껌 봉지를 꺼낸 주면 갑자기 생기발랄해진다.

각자 좋아하는 풍선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글 쓰는 아이들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결에 내 마음도 즐거워진다. 일석이조다. 시유는 풍선껌을 씹으며 ‘껌’이라는 시를 썼다. ‘아이 셔’로 끝난 걸 보면 블랙레몬 맛인가 보다. 

무슨 껌을 씹을까? 망고 맛, 딸기 맛, 샤인머스킷 맛, 복숭아 맛, 블랙레몬 맛, 콜라 맛, 소다 맛, 레인보우 맛?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기운 한 톨 남지 않고 다 빠져 달아났으니까 달달한 망고 맛으로! 노란색 껍질의 망고 껌 한 통을 집어 든다.

‘맹고 말고 망고’. 겉껍질에 적한 문구가 우스워서 혼자 키득거린다. 사실 아이들에게 주기는 했지만 껌을 씹은 기억은 별로 없다. 게다가 문구를 눈여겨본 적도 없다. 

‘책을 좀 펴놓기라도 하지?, 너와 함께 있었던 그 향기, 외모+10 증가, 긴급 속보야... 내일은 학교 가는 날’ 등 껍질에 씌어 있는 문구들이 재미있다. 나는 두세 통을 까서 주욱 펼쳐 놓고 껍질에 쓰인 글들을 구경한다.

‘포기하지 마. 난 네 꿈을 응원해, 오늘 끝나고 치킨각?, 저기압이면 고기앞으로?, 옛다 하트♥♥♥, 불허한다 내 사람이니까, 두뇌용량 초과……’ 그래서 아이들이 문구 맘에 안 뜬다고 바꿔 달라는 거였구나. 어쩌면 아이들은 이런 문구 하나에도 작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양한 문구가 써있는 풍선껌. 써있는 글들을 읽노라면 가끔씩 헛웃음이 나오며 맘이 가벼워지곤 한다.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다양한 문구가 써있는 풍선껌. 써있는 글들을 읽노라면 가끔씩 헛웃음이 나오며 맘이 가벼워지곤 한다.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나는 ’맹고 말고 망고‘ 껌 중에 ’너 요즘 하태핫해‘를 골랐다. 진지충인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문구다. 은박지 껍질을 벗기고 연노랑색 망고 껌을 입에 넣는다.

달착지근한 망고 향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씹을 때마다 온몸으로 퍼져 가는 달달한 향. 그리고 껌처럼 말랑말랑해지는 나. 나는 어느새 ’껌 좀 씹던 언니‘ 모드가 되어 건들건들거리며 가방을 둘러멘다. 

늘 비슷한 일상도 느낌은 매일 다르다. 하루를 가볍게 보내는 날은 괜찮지만 마음이 무거워 땅속으로 꺼져 들어갈 것만 같은 날도 있다.   

알뜰하게, 꽉 차게 오늘을 산 나에게, 수고했어! 내가 내 어깨를 토닥인다. 그리곤 씹고 있던 풍선껌을 혀로 밀어 후 하고 크게 불어 본다. 풍선만큼 커지는 희망! 독서교실에 남아 있는 정우의 시가 빠이빠이 손을 흔든다.  

<풍선껌> 

네모난 블랙레몬 풍선껌 / 껍질을 까서 입에 넣으니 달고 셔 / 씹을수록 단맛은 빠지고 느낌이 부드러워진다 // 풍선껌을 이빨에 걸고 / 늘리며 후후 불면 풍선이 된다 / 풍선껌이 커지면 내 마음이 둥실둥실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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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 2023-05-06 09:31:39
감사합니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의미와 희망을 찾는 일. 그게 지혜로움이겠죠^^

민민연 2023-04-30 18:17:19
어릴 적 껌 좀 씹던 나~~
입안 가득 풍선껌을 넣고 단물 다 빠지면 누가 더 크게 부는지 내기도 하고 부푼 풍선껌 터트리며 장난치던 나의 어린시절~~
그때 그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ㅎㅎ
선생님의 글은 항상 추억을 소환하네요^^
오늘도 바쁘게 산 나에게 어울리는 껌은~~~
"오늘 끝나고 치킨각"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나도 2023-04-28 22:41:13
글을 읽으니 갑자기 풍선껌을 씹고 싶어지내요.
살다보면 풍선껌같은 기분전환~~
꼭 필요합니다.
오늘은 '' 상상을 뛰어넘는 재미"
껌을 씹어야될 듯~~~

꿈그리기 2023-04-28 20:49:13
아이들이... 대학생 아이들도 ㅠㅠ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을 문제로 바라보는 내가 잘못된건지...
그래도 풍선껌이라는 시가 깜찍하고 귀여워서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