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의 전개와 분열을 정리한 「NL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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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의 전개와 분열을 정리한 「NL 현대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3.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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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동구권 붕괴, 북한의 기아사태-핵실험 등 고민 빠져

 

NL, 주사파, 종북….

지난 한 세대를 풍미하고, 지금도 익숙한 용어들이다.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을 계기로 분출한 반미운동과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운동이 만들어 낸, 지난 30여년의 경향이다.

그 실체는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그 세력이 정치권과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6년에 시작된 NL은 National Liberation, 즉 ‘민족 해방’의 약자로 한국사회의 주적을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다. 진보진영에서 NL과 때론 논쟁을 벌이며 때론 협조한 세력이 PD(Peaple's Democracy) 계열이다. 민중민주주의라고 한다. 인민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 책 표지 /출판사

한겨례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박찬수씨가 최근 「NL 현대사」라는 책을 출판했다. (2017, 인물과 사상사) 부제는 ‘강철 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질곡에서 반미 운동이 등장하고, 1986년 어느날 강철이라는 필명의 김영환이 서신(강철서신) 형태의 유인물을 대학가에 배포하면서 운동권에 NL이라는 사조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 시대를 함께 겪은 사람으로, 박찬수의 「NL 현대사」를 실감나게 읽었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전해들은 주체사상파의 동향과 운동에 대해 이 책자를 통해 상세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박찬수씨는 언론인의 감각으로 30여년을 관통하는 운동권의 주도적 이념의 흐름을 관찰하며 자료들을 모아 책자로 냈다. 한겨례신문 편집국에서 느끼는 세력 간의 갈등도 보여주면서 저자는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대목은 주사파 이론을 이끈 김영환이 김일성을 만나고 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보고 전향을 하게 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처리해 버렸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떠받들던 동유럽 사회주의와 소련의 붕괴, 김일성 김정일 세습 독제체제,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굶주림등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지도 중요한 포인트인데, 저자는 어물쩡 넘어간 느낌을 주었다. 운동 세력들이 애써 이 대목에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책자는 김영환 등 일부 전향파들의 배신과 프락치설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상세하게 다뤘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는 편협된, 그들만의 세계를 정리한 책자로 평가된다.

반쪽의 세계에서 고립된 그들만의 논리싸움과 투쟁은 조선시대 주리론이니 주이론이니 하는 싸움과 다를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북한 핵실험은 무엇을 노리는지, 그런 얘기는 일체 없다. 진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세계의 변화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민중의 삶을 고민해야 하는데, 주사파든, 평등파든 그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흐름을 정리한 이덕일의 사화 당쟁론을 읽은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전체적인 내용 흐름은 출판사의 서평으로 대체한다.

 

<출판사 서평>

 

1986년, 김영환이 ‘강철’이라는 가명으로 쓴 6편의 팸플릿이 대학가를 휩쓴다. 훗날 ‘강철서신’이라 불리는 이 팸플릿에서 그는 먼 훗날의 과제로 여기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한 것이다.

이후 NL 사조는 기존 학생운동의 중심인 ‘언더서클’ 해체를 유도하고 주도권을 잡는다. 민족주의 대중노선 품성론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전대협을 결성해 대중조직과 활동가조직을 하나로 모으면서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이념 지향성이 강한 활동가들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점점 대중과 멀어지면서, 전대협과 그 후신인 한총련은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쇠퇴하고 만다. 학생운동에서 보인 NL의 패권주의와 PD의 피해의식은 훗날 정파 갈등으로 이어져 민주노동당 분당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1991년 평양 방문 후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에 실망하고, 일단의 무리와 함께 집단 전향한다. 그가 ‘안기부 프락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운동권 내부의 의심은 여기서 비롯했다. 이후 김영환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NL 전향파 중 일부는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한다. 뉴라이트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국가주의 보수와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극우 이미지를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파문 이후 ‘친일’, ‘독재 미화’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점 추락하고 만다.

저자는 “NL이 과거의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격동의 시기를 지나쳐온 점”이 가장 아픈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NL을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렸다. 1990년대 학생운동의 퇴조와 통일운동 협소화에 NL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이제는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은 강철서신의 등장에서 반독재 투쟁, 광주 학살과 반미운동, 문익환 목사와 통일운동,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과 한총련, 공안기관의 감시와 프락치, 구학련, 민혁당, 민주노동당 내 정파 갈등과 통합진보당 해산, 전향파와 뉴라이트의 역사교과서 논란까지, NL 사조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다.

 

몇 년 전 논란이 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관련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용어가 있었다. NL, PD, RO……. 학생운동이 쇠퇴한 이후 대학을 다닌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약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도층인 ‘86세대’, 즉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이들을 이해하려면 학생운동과 NL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좋든 싫든 모두가 NL의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NL 사조는 어떻게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을까? ‘주사파’가 북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주사파가 어떻게 NL 운동권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통일은 무엇인가? 신념에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목숨을 걸고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 중 많은 수가 왜 극단적인 전향을 택했을까? 그토록 가치를 부여하며 매달린 일에서 어렇게 쉽게 등 돌릴 수 있는가? 도대체 NL의 뭐가 문제기에,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걸까?

자유, 민족, 노동, 겨레, 통일……. 취업전선에 내몰린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독재정권 시대, 많은 사람의 신념과 열정이 우리 사회의 변혁을 이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에는 항상 NL이 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직간접적으로 NL을 경험한 세대가 다양하고, 이제껏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도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들의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시대를 살면서 NL을 직접 겪은 이들이 이름을 밝히거나 익명(匿名)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에 근접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내용 발췌

 

비로소 팸플릿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졌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먼 훗날의 과제로 여기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반제국주의는 ‘반미’라는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했다. 이전의 학생운동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출현이었다. --- p.22~23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은 학원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까지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베이징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 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 p.77~78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전경련)나 대기업보다 앞선 순위였다. 수만 명의 학생이 일사불란하게 ‘구국의 강철대오’를 외칠 때, 전대협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1년 분신정국과 강경대 사망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였고, 1996년 전대협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엇이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후퇴를 가져왔을까? 학생운동의 조직과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던 NL 사조는 어떤 질곡으로 작용한 것일까? --- p.126

“1987년 6월항쟁만 하더라도 그걸 이끌어가는 야당이 있고, 재야의 스타급 인사들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촛불집회를 이끌어가는 건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회사원, 노인까지 일반 시민의 ‘집단지성’이다. 오히려 정당과 단체는 그 뒤를 따라간다. 정치지도자가 대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대중이 정치지도자를 이끄는 시대, 곧 리더십이 쌍방향으로 흐르는 시대다. 굳이 ‘NL’이란 프리즘으로 보자면, NL의 대중노선이 오늘에 맞게 재구성되고 재구현된 게 창조적 다수로서의 ‘시민’이 아닌가 싶다.” --- p.175~176

수많은 젊음이 ‘광주 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몸을 던지던 시절이 있었다. ‘열사’라는 호칭이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시절이었다. ‘열사의 시대’는 갔다. ‘열사’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끼는 시대다. ‘열사’는 어떤 상황에서 탄생해서 사회적 함의를 획득했고, 어떻게 소멸해간 것일까.……‘열사’와 ‘광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폭압적인 정권 또는 체제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자 추모의 대상을 뜻한다. 열사의 등장은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특정 시점에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p.253

저항적 자살이 잇따른 또 다른 시기는 1991년이었다. 그해에 모두 11명이 분신했고, 그중 9명은 흔히 ‘분신정국’이라 불린 5월투쟁 기간에 몸을 살랐다.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교내시위 도중 경찰 폭행으로 숨졌다. 강경대의 죽음은 5월 내내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시위를 불러왔다. 또 이 기간에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차태권, 김철수, 정상순이 분신했다.……하지만 5월투쟁과 잇따른 분신은 오히려 학생운동을 비롯한 전체 저항운동의 약화와 고립을 가져왔다. 공안세력은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해냈고, “분신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는 프레임으로 대중과 운동권을 분리했다. 폭압적 독재정권 아래서 운동을 확산하는 역할을 했던 저항적 자살은 그 의미를 다해가고 있었다. --- p.261~262

민노당과 통진당은 대중정당을 지향했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성장했다. ‘경기동부’는 그런 대중정당의 정파로서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전체 당원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던진 수많은 일반 유권자의 요구를 강고한 조직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대중활동에서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경기동부가 잊고 있었던 건, 진보정당 역시 대중정당이란 사실이었다. ---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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