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시한부 인생 살다 우주로 떠난 스티븐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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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시한부 인생 살다 우주로 떠난 스티븐 호킹
  • 김현민
  • 승인 2018.03.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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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 루게릭병 불구, "하고 싶은 게 많고, 시간 낭비 싫다"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14일 우주로 떠났다. 향년 76세.

그의 자녀들은 성명을 내고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오늘 저 세상으로 떠나서 무척 슬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이으며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혀왔다. 그는 블랙홀에 관한 상대성 이론과 우주론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장애를 딛고 50년 이상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인생역정이 후대에 큰 감명을 주었다.

 

스티븐 호킹은 1942년 1월 8일 영국 옥스퍼드에서 프랭크 호킹과 이소벨 호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학업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17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호킹이 루게릭병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이가 21살이었다. 의사는 당시 그가 앞으로 2년 정도의 시한부 삶을 살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호킹은 그는 좌절하기는커녕 더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당시 내 꿈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 상태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나는 삶에 대해 지겨워하고 있었다. 가치 있는 어떤 것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내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내가 처형당하는 꿈을 꿨다. 갑자기 나는 내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면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내 스스로가 놀랍게도 과거보다 지금의 나의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그의 증세는 의사가 예상한 것보다 무척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는 상대론과 우주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루게릭 병 진단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연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966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루게릭병을 진단받기 직전에 여동생의 친구인 제인 와일드(Jane Wilde)라는 문학도 여성을 파티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둘은 호킹이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뒤인 1964년에 약혼을 했고, 이듬해 결혼했다. 그녀는 호킹이 집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호킹의 옆에서 간호하면서 격려했다. 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1985년, 호킹은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에 다녀오다가 폐렴에 걸렸고, 사경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회복되었지만 목소리를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특수 장치와 컴퓨터를 장착한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기계장치들은 호킹의 손가락이나 눈썹의 운동을 인지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 말을 하고 글을 다시 쓸 수 있게 했다. 그는 이 장치 의 도움으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88년 발간한 대중 과학서 '시간의 역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떠올라 전세계에 1,000만 권 이상 팔렸으며,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237주 동안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호킹은 25년 간 결혼생활을 했던 제인과 헤어진 후 일레인 메이슨과 재혼했지만, 2006년에 일레인과도 이혼했다.

 

▲ 14일 향년 76세로 타계한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위키피디아

 

그는 언젠가 자신의 병에 대해 "일찍 죽을 것이라는 예상 속에 내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다"면서 "그래서 시간은 나에게 언제나 귀중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호킹은 "하고 싶은 게 많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 지역의 자선 버스 캠페인에 참여하고 영국 국민건강보험(NHS) 민영화에 반대하는 등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1세기 들어서도 호킹 박사는 저술활동을 계속했고, 전 세계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호킹은 1974년에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고, 왕립학회에서 아인슈타인 상과 휴즈 메달을 받았다. 1980년에는 기사 작위 바로 아래의 위치인 커맨더(Commander)에 임명되었고, 세기의 인물에게 주어지는 명예훈장(Companion of Honour)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우주론에 대한 그의 이론물리학은 실험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노벨상은 실험적으로 확실한 업적이나, 혁신적인 이론 중에서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들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소설가 댄 브라운은 소설 「천사와 악마」를 쓰면서 스티븐 호킹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호킹 박사는 삶을 연장하는 과정에서 '특이점 정리', '블랙홀 증발', '양자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에 혁명적 이론을 제시했다.

2011년에 그는 현대 사회에서 “철학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과거에 철학이 했던 일의 대부분은 과학에 의해서 질문되며 답을 얻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호킹은 이어 “내 관점에 의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고 종교관을 피력해 종교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08년에는 “우주의 광활함을 고려했을 때, 우주 어딘가에 원시적인 형태의 외계인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며, 지적 생명체의 존재 또한 가능하다”고 했으며, 2015년에는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1990년과 2000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강연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3년 영국에 살 때 케임브리지에서 이웃으로 살면서 우정을 나눈 사이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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