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발견] 2.5. 無明촉 命名촉 否定촉의 선택
상태바
[붓다의 발견] 2.5. 無明촉 命名촉 否定촉의 선택
  • 주우(宙宇)
  • 승인 2018.03.11 1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D15)에 ‘어떤 모양ākāra이나 특성liṅga이나 표상nimitta相이나 표시uddesa에 의해 명신nāmakāya名身과 색신rūpakāya色身이 설정되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색신色身에 대한 명명(이름 붙이기)을 통해 생기는 명명촉adhivacanasamphassa命名觸이 그리고 명신名身에 대한 부정을 통해 생기는 부정촉paṭighasamphassa否定觸이 설정되고 만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설정되는 명색名色이 촉의 원인 ‧ 인연 ‧ 집기 ‧ 조건이다.’고 한다. 색신色身은 물질화한 까야kāya身인 대상의 형태적 요소며, 명신名身은 정신화한 까야인 대상의 개념적 요소다. 까야에 수반되는 명색이라는 분리의식이 문제의 (명명촉과 부정촉을 통칭하는) 무명촉avijjāsamphassa無明觸을 일으킨다.

여기서 명명촉命名觸이라는 이름은 색色{~촉觸}이 제시하는 외부의 모습인 색신色身에 대해 자기만의(반성적) 방식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시류에 편승해서 이름(딱지)을 붙이기 때문이고, 부정촉否定觸(유대有待촉으로 번역되어옴)이라는 이름은 법경法境이 제시하는 내적 의미인 명신名身에 대해 부정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경(D15)에 ‘명색과 식識이 서로 조건이 되면 태어나서 늙고 죽어서 유전流轉하는데, 반야의 영역(paññāvacara)이 유전流轉하는 상태를 설정하기 위해 명칭(adhivacana)의 길(patha), 표현(nirutti)의 길, 개념(paññatti)의 길이 전개된다.’고 한다. 즉 유전하며 살면서 반야 영역을 선택해서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정할manasikara 때까지는 이름을 붙이고 표현하며 개념을 정립할 기회가 지속해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소쉬르(Saussure)는 언어적 기호記號에서 소리의 면(기호형태)을 기표(記標signifiant)라고 하고, 뜻의 면(기호내용)을 기의(記意signifié)라고 했다. 둘 사이에는 자의恣意적이고 개인이 변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집단적이다. 여기서 기표記標가 색신rūpakāya色身에, 기의記意가 명신nāmakāya名身에 해당한다.

지금의 휴대(mobile)전화를 셀룰러(cellular) 폰으로 특정인들이 임의로 이름을 붙였으므로(명명촉) 과거에 통용되었다. 그러나 휴대전화가 각자에게 주어지는 주관적 의미가 다를지라도 대다수 외부의 집단이 통용해서 쓰는 의미에 종속되고(부정촉) 만다. 즉 개인의 진실이 집단의식에 묻혀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構造主義는 각자가 무의식에서 수용한 특정 구조물 아래에 사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돕는다.

이를테면 상대에게 기분이 나쁘면서도 ‘좋다’고 하고, 배고프면서도 ‘밥을 먹었다’고 하며, 사실상 부부가 서로 이용하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부모 ‧ 상사 ‧ 동료 ‧ 국회의원 ‧ 시장 ‧ 대통령의 비리를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고도 눈감으며, 우주가 준 가피加被(기적) 덕택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도 ‘우연’이라든가 ‘운이 좋았다’고 하고, 자신의 자녀가 사실상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인데도 있는 그대로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자식’이라고 한다면, 모두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무명촉이다. 이는 상대방(대상)이 자신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권위, 체면 등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혹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자기부정이므로 결국 자신의 무명無明과 고루痼漏를 낳아서 새로운 악순환의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경(S35:135)에서 붓다는 ‘6촉장六觸場이라는 천상과 지옥을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어떤 색色{~법法}을 인식하든지 간에 한쪽은 원했고 좋고 마음 드는 것만을 인식하고, 한쪽은 원하지 않았고 좋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을 인식한다. 이처럼 청정한 삶을 선택할 기회를 얻은 것은 우리에게 이득이다’고 한다.

경(S12:25)에 ‘자신이나 타자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든, 아니면 원인이 없이 펼쳐진다고 주장하든 즐거움 ‧ 괴로움은 촉phassa觸을 조건으로 한다.’고 한다. 경(S22:82)에 ‘촉phassa觸을 원인과 조건으로 수상위受想爲가 있다’고 한다.

붓다는 이런 명명촉命名觸 ‧ 부정촉否定觸 때문에 본격적으로 고통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는 집단에 적응하고 생존하려고 개인의 진실(담마)을 지키지 않고 대세를 추종하기 때문이다. 안전을 확보하려 하나 결국 괴로움을 초래한다. 일종의 일반화 오류다. 그러므로 언제나 의심하고 따져봐야 한다.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경(S22:47)에는 “오취온五取蘊을 atta로 보고 ~~ 여겨서 ‘이것이 나’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근眼根{~신근身根}이 전개된다. 그때 담마dhamma ‧ 마음mano ‧ 명계vijjādhātu明界가 있음에도 무명과 함께하는 무명촉觸에서 생긴 수受에 의해서 자아ahaṁ自我 ‧ 색色 ‧ 상想에 대한 온갖 망상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진실을 부정하는 명명촉命名觸 ‧ 부정촉否定觸을 무명촉無明觸이라 하고, 명지明知상태에서 자기 진실에 홀로서는 명촉明燭과 대비된다.

 

대상에 대한 탐진치貪瞋痴로 양심을 속이면 무명촉無明觸 ⇒ 고苦로 나아간다.

대상에 대한 사띠sati念로 양심을 지키면 명촉明燭 ⇒ 반야般若로 나아간다.

 

경(S12:19)에서 말하듯이 무명촉觸은 대부분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매이면 까야kāya가 집기해서 자신이 대상에 대해 마음을 일으켜서 정하는 것이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진실이 아니라고 명계明界에서 신호가 오는 데도) 판단해버림으로써 발생한다.

 

# 명계vijjādhātu明界와 법경dhamma法境

 

현상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고 정하는 바에 따라 제시되는 법경法境은, 대상에 대한 진실을 일러주는 명계明界로서 항상 기능하지 않는다. 우주는 대상을 제대로 알아볼 기회를 제공하지 절대 견해를 강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각자가 진정 원하는 대로 담마를 제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양심 ‧ 수치심이 있다면 알아볼 수 있는 명계가 적절히 제시된다.

 

이처럼 자기(의 양심)를 부정하는paṭigha 무명촉 상태는 단기적으로는 편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다들 그래’로 일반화한다거나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처럼 핑계를 댄다 해도 자기 양심을 속이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즉 우주의 메시지dhamma法를 지속해서 무시한다면 결국 지옥을 맛본다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대상을 인식하는 역할은 위爲의 조종 아래 수상식受想識이 하나, 의사를 결정하는 역할은 마음mano에서 작심manasikara乍心이 한다. 특히 ①색色{~촉觸}인 전오경前五境이 제공하는 상nimitta相에 대해 의미를 정하고, ②새로운 식識이 발생한 다음에 촉장觸場에서 오로誤路나 정로正路를 정할 때이다.

이때 바르게yoniso 마음을 일으키고 정할manasikāra 수도, 그르게ayoniso 마음을 일으키고 정할 수도 있다. 바른 작심manasikara乍心이 바로 정견正見이며, 그른 작심이 치moha痴이다. 바른 작심乍心을 통해서만 팔정도八聖道의 정로正路sammāpaṭipadā를 걸어갈 수 있고, 그른 작심乍心이 오로micchāpaṭipadā誤路인 팔오도八誤道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작심乍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일단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되지 않으므로 (상대나 외부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존재상태가 바뀌려면 반야의 안목(慧眼paññācakkhunā)을 키워주는 담마에 의한 수행과정이 도움된다는 것이다.

대다수 인생은 위爲의 의도 아래 작심乍心이라는 선택으로 좌우된다.

 

경(M28)에 “타인이 자신을 꾸짖고 질책하며 분노하여 상처를 준다면, ‘나에게 청각의 접촉聲觸(sotasamphassa)을 조건으로 한 괴로운 감정苦受(dukkhā vedanā)이 펼쳐진다’고, 촉觸이라는 조건이 없지 않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 촉觸{수受, 상想, 위爲, 식識}은 무상하다고 봅니다.”고 한다. 그러나 대상에 반응하지 않으면 괴로운 감정에서 일시 벗어나나 조건에 따라 펼쳐지는 무상한 현실은 개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경(A4:174)에 ‘6촉장觸場이 있는 한 망상papañca妄想이 지속하고, 망상이 지속하는 한 6촉장이 있게 된다’고 한다.

반면에 비록 대상과 자신이 분리 상태(名色)임을 모르더라도 대상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긴다면, 이 마음상태에 따라 법경dhamma法境이 제공하는 법상法相을 주목해서 흘려버리지 않으며, 그 상相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려 노력하기Ⓒ 시작한다.

경(S35:134)에는 ‘학인들은 아라한처럼 방일放逸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방일해서는 안 된다. 안眼{~심心}으로 인식되는 색色{~법法}이 마음mano에 들든 들지 않든 색色{~법法}에 촉觸하고 접촉하더라도 색色{~법法}이 생각citta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6촉장六觸場에서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경(S38:6)에 ‘육촉장六觸場의 집기 ‧ 의역意易 ‧ 유혹 ‧ 위험 ‧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집착 없이 해탈하면 안식assāsa安息을 성취하고 이를 위한 팔정도가 있으므로 방일하지 말라’고 한다.

이렇듯 6촉장을 벗어나려면 현상(담마)이 제시하는 메시지(담마)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사띠수행을 통해서 반야해탈慧解脫을 성취해야 한다. 즉 담마가 제공하는 법상法相에 적중하도록 정로正路인 ⒸⒹ의 길을 가서 명지明知 상태Ⓔ가 돼야 한다.

대상에 대한 지집환로知集還路를 통해 정견正見을 확립하고 중도를 통해서 팔정도八聖道를 가야 하나 현실적으로 명촉明燭을 적용하려면,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소유가 아니라 보살피는 존재로 여기며 관찰하는 방식이 도움된다. ‘하늘이라 하는 것’ ‘엄마라 하는 사람’ ‘집이라 하는 곳’ ‘낮이라 하는 때’ 등 이런 ‘~이라 하는 ~’ 식으로 대상의 객관적 명칭에 지배받지 않고서 대상이 자신에게 제시하는 의미를 사유해보는 방식이다.

 

명명촉命名觸은 부정 ‧ 긍정적 대상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긍정적 활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손톱을 물어뜯는 나쁜 습관에 ‘세균’이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명명함으로써 그 행위가 벌어질 때마다 이 습관을 ‘세균’이라고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 습관을 의식하다 보면 무의식으로 행위하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곧 그 습관을 그만둘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방식은 ‘내가 대상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몸짓이었던 것이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자신에게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서, 즉 그것이 자기에게 주는 의미에 따라서 적합한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 존재로 하여금 더 힘있고, 더 지혜롭고, 더 잘되게 해주어 존재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이는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고심해서 대상과 하나 되어야만 알아지는 화두話頭와 유사하다. 이런 방식을 굳이 명명命名한다면 명촉明觸이 될 것이다.

 

‘혜⇒계⇒정’의 순서로 된 팔정도八聖道에서 맨 처음 ‘정견’이 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상을 제대로 알아보는 정견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면 성스러운 길magga道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다만 제대로 된 길(正道)로 가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들쑤시다가 그 길이 정로正路가 아님을 깨닫고서 출발선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정견正見을 갖출 수 있을까?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