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발견] 2.4. 선택에 관련한 믿음 양심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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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발견] 2.4. 선택에 관련한 믿음 양심 수치심
  • 주우(宙宇)
  • 승인 2018.03.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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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Snp1045)에 ‘욕락을 욕심내거나 마음이 혼란되지 않으며 모든 담마에 능하며 사띠하고 유행遊行해야 한다.’는 수행자, 즉 학인sekha學人의 힘bala力에는 믿음saddhā, 양심hirika良心, 수치심ottappa, 정진vīriya精進, 반야paññā般若가 있다.

여기서 믿음이란 것은 신이나 붓다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각자에게 벌어지는 현상(담마)이 자신을 도와서 성장하고 잘되게 한다는 신뢰를 말한다. 즉 벌어진 사건을 단기적 이해득실로 판단하기보다 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41쪽 실례에서 여성이 만일 세간의 법칙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을 존중하며 살기 시작했다면(만일 돈 많은 남성을 만나기를 꿈꾸고 있다면 사기꾼이 나타날 수 있으나) 비록 마음 들지 않는 남성이 나타났더라도 업보業報, 서원誓願 등에 비추어 가장 유익한 현상이 벌어졌으리라고 우주에 믿음을 주는 방식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그 남성이 자신에게 완벽한 역할을 하리라고 우주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양심hiri慚과 수치심ottappa愧을 각각 악행에 대한 내적인 부끄러움, 외적인 창피함이라고 하나 일반인과 달리 수행인에게 양심이 필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특정 현상이 벌어졌음에도 이를 자신에게 벌어진 사실로 인정하거나 타인들에게 알릴 기회를 맞이했을 때다. 이를테면 고질적 습관인 ‘담배를 끊으라’는 은밀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내세울 만한 객관적 기적이 아니라 사소한 개인적 현상, 특히나 자신에게 불편한 메시지(담마法)를 접했을 때다.

여기서 양심은 특정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 즉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사실(허물)을 은폐하거나 묻어버리지 말고 (타인이 자신을 불신하리라고 예상되더라도) 우주를 믿고서 공개하라는 것이다. 양심이 불량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내면화한 고통을 만만한 희생양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일어나는 수치심은 차치하더라도 자신만의 시선으로도 자신을 성찰하는 수치심이 없다면,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심언행心言行을 성찰하는 신독愼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수행의 진전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자신에게 벌어진 사실만이라도 인정하는 양심 ‧ 수치심이 갖춰지지 않으면, 그래서 우주가 제시하는 담마를 무시하는 존재상태라면, 이런 이는 소위 양심에 털이 나서 고질병이 된 자신의 고루āsava痼漏를 은밀히 주변에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행 초기에 양심 ‧ 수치심을 강조하는 것은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기 전에 먼저 벌어지고 인지된 현상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믿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자신에게 정견正見이 제시되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할 것이다. 그래서 경(A8:81)에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경(S7:11)에서 밭갈고 씨뿌린 뒤 먹으라는 브라만의 말에 붓다는 “믿음이 씨앗에, 수련tapo은 빗물에, 반야는 멍에(원인)와 쟁기(결과)에, 양심은 쟁기자루īsā에, 마음은 (멍에와 쟁기를 연결하는) 밧줄에, 사띠는 (마음 밭을 갈아엎는) 보습phāla과 (바른길로 인도하는) 몰이막대pācana에 해당합니다. 몸과 말을 제어하고 음식을 절제한 진실은 잡초 제거에, 공감은 (멍에를 벗는) 해방에, 속박에서 평심으로 이끄는 정진은 짐을 싣고 슬픔이 없는 곳에 도달해서 돌아오지 않는 황소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밭을 갈면 불사不死의 결실을 거두며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고 한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씨를 뿌려서 불사라는 결실을 얻으려 밭을 갈 때 쟁기 손잡이(자루)를 굳게 붙들 듯이, 마음 밭을 갈면서 수행할 때에도 (자루에 해당하는) 양심을 언제나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

경(S22:81)에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의 견해가 있거나 의혹 ‧ 의심이 있어서 바른 담마(saddhamma)에 도달하지 못해도 위爲이다.’고 한다. 이처럼 의심 ‧ 회의가 있으면 비록 자신에게 정견正見이 제시될지라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흘려보낸다. 이 상태에서는 기적 같은 체험이 주어져도 ‘혹시나 자신이 (제대로) 홀리는 게 아닐까?’라며 ‘자신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며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므로)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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