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한강 양안의 강변도로는 제방입니다. 교량 구간을 제외한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의 대부분 구간이 도로 옆 주거 공간이나 한강공원보다 높은 지형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평상시에는 도로이지만 홍수가 닥치면 제방인 거죠.
한강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 하천에 가까웠습니다. 강남과 강북의 한강 기슭에는 백사장이 펼쳐졌고, 갈수기와 장마 시기에는 흐르는 수량이 달라 강폭이 좁아지거나 넓어지곤 했지요. 지금은 백사장을 찾아볼 수 없고 홍수만 아니라면 일년내내 강폭이 거의 일정하지만요.
백사장 사이를 유유히 흘렀던 한강의 옛 모습을 조선일보 1970년 7월 17일의 ‘서울의 길 닦아온 25년 어느 과장의 사임’이라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기사는 서울시청에서 퇴직한 오모 과장의 일화를 소개하는데요 청담동에 살던 그는 25년간을 한결같이 나루를 건너 통근했다고 합니다.
뚝섬, 강남북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
교량이 없던 시절에 뚝섬은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 기사가 나온 1970년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한남대교는 1969년 말에 완공됐고, 영동대교는 1973년에야 완공될 예정이었으니 오 과장이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25년간 거의 매일 청담동의 청수나루와 뚝섬나루를 연결하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밤늦게 퇴근할 때 나룻배가 끊기면 오 과장은 한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다네요.
오 과장이 헤엄친 구간은 아마도 영동대교 근처일 겁니다. 예전에 뚝섬나루와 청수나루를 연결하던 나룻배 노선이 지나던 곳이 영동대교이니까요. 그런데 다리를 지나가 본 분들은 강폭이 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강물도 깊어 보이는 데다 빨라 보이지요. 그런 곳을 밤늦게 헤엄쳐 건넜다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동대교 북단의 한강공원에서 만난 노인들이 갈수기라면 가능했을 거라 증언했습니다. 자양동 인근에서 어릴 적부터 살아왔다는 그분들은 뚝섬 앞 한강이 예전에는 강폭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갈수기에는 강폭이 더욱 줄어드는 데다 그리 깊지 않았다고도 증언했지요.
게다가 뚝섬에서 강 중앙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으니 물길과 수영에 익숙하면 헤엄쳐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장마가 오면 어림없었을 것이라 했지만요.
사실 제가 그분들을 인터뷰한 이유는 한강 유역 주민들에게 한강에 대한 기억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인들이 젊은 시절 한강에서 헤엄친 경험을 털어놓을 때 문득 오 과장의 일화가 떠올라 혹시나 하고 그분들에게 물어봤던 거죠.
그런데 한강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아온 그분들은 홍수에 대한 기억이 많았습니다. 저지대로 유명한 망원동에서 만난 노인들의 기억도 그랬지요. 한강과 망원동 사이에 강변북로와 유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거의 매년 장마 때마다 침수 피해를 봤다고 하네요. 물론 1984년처럼 기록적 폭우와 인재가 겹쳐 제방과 유수지가 소용없던 적도 있었지만요.
관련 자료를 보면 한강이 개발되기 전 평상시의 강폭은 50m에서 100m 정도였고, 장마가 오면 1500m에서 넓게는 3000m 정도까지 넓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방이 없던 시절 큰비만 내리면 한강 양안의 저지대는 홍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방을 쌓아 한강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강 연안에 제방을 쌓기 시작한 건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이후부터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부터 용산과 원효로, 노량진과 영등포, 그러니까 주로 일제의 시설이 몰려있는 지역과 가까운 강변 위주로 제방을 쌓은 거죠. 그 외의 지역은 아직 홍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의 한강 양안에 도로를 겸한 제방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지금의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다만 제방은 홍수 규모에 따른 한계가 있어서 근본적인 물 관리, 즉 치수(治水)가 필요했지요. 만약 강의 수위가 1년 내내 일정하다면 그 강변 일대는 홍수나 갈수(渴水)의 고민이 없을 겁니다. 강물의 양이 많을 때 저장해 두었다가 물이 필요할 때 흘려보내면 되니까요. 댐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난 1966년 당시 한강 상류에는 5개의 댐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화천댐과 청평댐, 한국전쟁 직후에 건설된 괴산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 건설된 춘천댐과 의암댐. 그런데 이 댐들은 모두 수력발전을 위한 시설이었지요. 주로 전기를 만들었고 한강 유역의 수량을 조절하는 기능은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한강 상류의 다목적댐 건설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댐은 커다란 저수지입니다. 장마 등 집중호우 때 물을 받아 가둬두고 하류로 물이 일시에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지요. 이렇게 저장해 둔 물을 필요할 때 필요한 양을 방출하면 수력발전은 물론, 관개용수, 공업용수, 상수도 용수 등으로 쓸 수 있습니다. 다목적댐은 이러한 다목적 기능을 하는 댐을 말하는 거죠.
1966년 정부는 북한강 상류인 소양강에 댐 건설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관련 부처들이 댐을 수력발전으로 하느냐 다목적댐으로 하느냐를 두고 부처 간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고 하네요. 수력발전은 당시 상공부와 산하 기관인 한국전력 소관이었고, 다목적댐은 건설부의 수자원국 소관이었으니까요.
소양강댐 건설로 사라진 한강 백사장
결국, 소양감댐 건설은 건설부에서 관리하는 다목적댐으로 결정되었고, 1967년 11월 이 사업을 전담할 한국수자원공사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한편, 수력발전은 현재 한전의 자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맡고 있습니다.
소양강댐은 1968년 10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2년 11월에 준공되었습니다. 만수가 되었을 때 이 댐의 넓이는 70㎢이고 총저수용량은 29억 톤에 달하지요.
남한강 상류에도 다목적댐인 충주댐이 1980년 1월에 공사에 들어가 1985년 10월에 준공되었습니다. 댐의 넓이는 97㎢이고 27억 5천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지요. 두 댐보다 규모가 작지만, 팔당댐도 한강 수계의 다목적댐입니다. 서울에서 가까워 서울 권역의 한강 수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상류에 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서울의 한강 유역은 모습이 달라져 갔습니다. 큰 홍수만 아니라면 흐르는 수량이 일정하게 되었고, 직강화 공사를 통해 대체로 넓고 곧게 뻗은 큰 강이 되었습니다. 강바닥을 퍼내는 준설 공사를 통해 수로도 깊어졌지요. 다만 한강 양안에 펼쳐졌던 백사장은 사라졌습니다.
백사장은 어디로 갔을까요? 예전에 백사장이 있던 곳은 대개 한강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제방도로 건설과 다목적댐 건설 등 한강 유역 개발은 서울 개발과 맞물리기도 했습니다. 한강의 변화를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서울의 확대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으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한강 양안을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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