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주재원의 아이들

시련과 배움의 기회…문화충격에 스스로 생존 법칙 배우는 애환도 조병수 프리랜서l승인2018.03.0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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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프리랜서] 큰 딸아이가 영국에 나갈 때가 막 첫돌이 지났을 때였고, 그곳 유아원에서 가운 입고 크리스마스 공연도 하며 영어로 제법 입이 떨어지려는 참에 귀국했다. 그때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그저 생선 보고 “피시(fish)”라고 하거나, 거꾸로 매달린 그림을 보고 “업 사이드 다운(upside down)”이라고 말해서 놀라게 하던 정도였다.

그랬던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초에 다시 미국학교에 전학을 했으니, 말이 통하지 않아서 무지 갑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과정(English as a second language: ESL)’에서 수업을 듣고, 정규수업시간에는 몇 개 과목만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ESL과정을 마치고 소정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제대로 정규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적응력이 빠른지, 오래지 않아 그 시험에 합격하고 정규수업을 다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가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을 즈음에는,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영어로 산수문제도 풀고 과학문제도 이야기해야 하니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밤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렸다가 자기 학교숙제를 도와달라고 했다.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지만, 아빠는 아빠대로 새로운 근무환경과 씨름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였다. 그러니 늦은 밤에 눈앞에 펼쳐지는 아이의 숙제가 은근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그러나 하루 종일 갑갑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자꾸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추스르며, 그 아이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우리말로 설명해가면서 풀이를 도왔다. 수학 같은 문제는 아빠에게도 생소한 용어들이 많아서, 이리저리 사전을 찾아보느라고 진땀깨나 흘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따로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스스로 숙제들을 챙겨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집으로 보내지는 과제물 노트에 기재된 평점도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다. 구시대 아빠의 성의 없는 조언보다 아이의 적응력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드디어 되었구나’라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씁쓰레한 기분도 들었다. 더 이상 밤늦은 시간에 사전을 뒤적이지 않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지만, 나의 어휘력이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의 해독(解讀)에도 문제가 있을 정도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방법이나 교과서들을 보면서, 단어도 단어지만 정말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들의 생활 깊숙이 뿌리 박힌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제대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책을 통해서’란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된 것이다.

그 아이와 함께 집 가까운 학교를 찾아가서 선생님들과 면담하고, 전학 및 예방접종 서류들을 제출한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연주회니, 졸업파티니’ 하면서 온갖 행사에 당당히 참여하는 의젓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그 동안 이질적인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느라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도, 3년 만에 그 곳을 떠나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항상 기본에 충실한 그 나라 교육제도의 좋은 점들을 실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제법 적응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고국 땅에서 또다시 다른 차원의 문화충격에 시달리겠구나’하는 연민을 느꼈다.

분명 그 아이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급작스런 변화들에 적응하느라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은 “아빠 따라 왔다갔다하던 그때, 말도 통하지 않고 갑갑한데 아빠와 엄마는 바쁘다고 곁에 잘 있어주지 않아서 힘들었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 영국 유아원의 크리스마스 파티 /사진=조병수

 

제법 터울이 있는 둘째 아이도 태어난 지 세 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미국땅을 밟고, 유아원이나 유치원(kindergarten)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다가 귀국했다. 그리고는 요즘 같은 조기 영어교육이란 것도 모른 채 지나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 아이 또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한번은 퇴근하니까 “아빠, ‘캔서’가 뭐야?”라고 물었다. 학교에서 짝인 여자애가 “Mom, cancer (엄마, 암)”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니까 재차 설명을 해주는데도 이해가 안 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무엇인가를 강조하길래 그냥 좋은 일인 줄 알고 “축하한다(congratulations)”고 했더니, 그 짝의 표정이 이상해지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뭔가 마음에 걸리며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이구 야’ 싶었다. “내일 학교 가거든, 그 말뜻을 몰라서 엉뚱한 대답을 했으니 미안하다고 해라”고 시키고, 사과하는 말을 가르쳐 보낸 일이 있다.

그렇게 시작한 외국에서의 공부였는데, 얼마 후에는 교내 TV프로그램 제작에도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이더니, 3년 후 중학교 졸업 때는 미국대통령 상까지 받고 귀국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대학 때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4년의 시간을 이겨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입시준비하고 미국대학교에 가면, 젊은 나이에 엄청 공부만 하게 되는 고생을 한다”는 우스개 말이 있다. 어쩌다 보니 두 아이 다 그런 경우가 되었다. 학업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이국 땅에 남거나, 홀로 먼 길을 나서며 가슴이 먹먹해지던 그런 세월들을 보내고,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자신들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다른 문화권을 오가면서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들을 보낸 것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의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해외근무를 나간 주재원의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살면서 다양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남다른 여건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할 때에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낯선 땅에서 다른 문화와 환경에 부딪히며 우여곡절을 겪는 주재원들 못지 않게, 어린 나이에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중압감과 문화충격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면서 스스로 생존의 법칙을 배워나가야 하는 그들 자녀들의 노력과 애환들도 깔려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여성이 학창시절, 부모 따라 해외 나갔다가 특례혜택 받고 좋은 학교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 분이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 따라 유럽에 가게 되고, 거기서 자녀를 키우다 보니, “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멀거니 앉아있는 자녀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고 한다.

그제서야 “전에 자신이 색안경 쓰고 쳐다보던 그 친구들도 어린 나이에 저런 경험을 하고, 그런 힘든 환경을 이겨낸 아이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때 그 친구들에 대해 좋지 않게만 생각한 것이 미안해지더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한때 주재원이었던 아빠로서 그런 얘기를 듣다가 보니, 일찍이 각자의 삶에 던져진 낯선 환경과 시련들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들의 꿈을 키워 나온 내 아이들이 새삼 고맙게 여겨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런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음도 감사하고···.

모쪼록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얻은 경험과 안목이 자신들의 삶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쓰임이 되기를 감히 기대해 본다.


조병수 프리랜서  bscho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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