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⑭ 다리 놓이자 일자리 잃은 한강의 뱃사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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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⑭ 다리 놓이자 일자리 잃은 한강의 뱃사공들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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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한강의 교량들은 강으로 잘린 서울을 이어주었습니다. 강 때문에 끊긴 길들, 남쪽과 북쪽에서 한강으로 향해 오던 길들을 다리로 연결해준 거죠. 교량을 건설하기 전에는 나루터와 나룻배가 그 역할을 맡았었습니다. 전쟁 때는 임금이 피난하는 경로가 되기도 했지요.

조선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면 병자호란 때 한강의 뱃사공이 임금 일행을 강 건너로 인도했다고 나옵니다. 어쩌면 그 뱃사공의 후예가 (섬이었던) 잠실에서 대를 이어 살면서 배를 몰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경향신문 1970년 10월 16일의 ‘서울, 새 풍속도 (8) 나루터를 쫓는 다리’ 기사에는 신천나루터에서 31년간 사공으로 일해온 양인환씨가 등장합니다. 양씨는 잠실에서 대대로 배를 몰아온 뱃사공 가문이라 밝히고는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사도 함께 소개하지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 일행을 양씨의 선조가 건네줬다고요.

1962년 한남동 한강 나루터의 나룻배. 강 건너로 잠원동의 미루나무가 보인다. 사진= 작가 미상

역사속으로 사라진 뱃사공 가문

양인환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던 뱃사공 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양씨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는 당시 기공식 행사를 앞둔 잠실대교를 소개하면서 1972년 즈음 다리가 완공되면 나루터의 일감이 끊겨 뱃사공도 함께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지요. 1969년 말 한남대교가 완공되자 인근 나루터가 사라진 사례를 들면서요.

기사는 잠실대교뿐 아니라 영동대교, 천호대교, 반포대교 등 당시 계획하던 한강의 교량들을 언급하면서 그곳에 있었던 나루터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래서 하일, 난지, 행주나루 정도만 남게 될 거라고요.

한강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나루터가 사라지고 뱃사공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취지의 기사는 1969년 말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교량 덕분에 달라진 여러 생활상 중 하나로 언급하지요. 

하지만 1972년 잠실대교 준공을 앞둔 신천나루와 그곳에서 일한 뱃사공들의 이야기는 당시 여러 언론에서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교량 건설뿐 아니라 한강의 하중도(下中島), 즉 섬이었던 잠실을 육지로 만드는 도시화의 영향으로 나루터가 사라지고 뱃사공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까요.

조선일보 1972년 1월 11일의 ‘떠나야 하는 최후의 뱃사공, 잠실교 준공 앞둔 숙이 아버지’ 기사는 잠실대교 준공을 6개월 정도 앞둔 신천나루와 뱃사공의 모습을 전합니다.

숙이 아버지 김용태씨는 19세인 1949년부터 신천나루에서 나룻배를 몰아왔다고 합니다. 숙이 아버지의 20년 넘는 경력은 신천나루 나룻배의 변천사이기도 하지요. 처음에는 열 명 정도 타는 작은 배였지만 2톤짜리 배를 거쳐 5톤짜리 배로 커졌고, 노를 젓는 방식에서 7마력짜리 통통배가, 나중에는 13마력 통통배가 나룻배를 뒤에서 밀어주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고 하네요. 

그런 숙이 아버지는 월급 사공입니다. 승용차 여러 대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배의 규모가 커졌지만 벌이는 시원찮다고 하네요. 하지만 잠실대교가 준공되면 그는 그나마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숙이 아버지는 “가재를 팔아서 채소 장사라도 해 보겠다”는 계획을 밝히지요.

조선일보 1972년 7월 1일자 기사. 나룻배에 집을 싣고 잠실을 떠나는 뱃사공을 다루고 있다. 출처=조선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조선일보 1972년 7월 1일의 ‘나룻배에 판자집, 가족 싣고 그 뱃사공은 떠났다’ 기사에는 인상적인 사진이 함께 실렸습니다. 잠실대교 개통 전날에 신천나루의 어느 사공이 자신이 몰던 4톤짜리 나룻배 위에 그가 살던 오막살이 한 채를 고스란히 떠 얹고 가족들과 한강 하류로 떠나는 모습을 사진과 함께 전하는 기사이지요.

주인공은 신천나루 최후의 뱃사공 송택슬씨 였습니다. 기사에는 그가 ‘숙이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위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채소 장사를 나서겠다던 그 ‘숙이 아버지’이지요. 하지만 숙이 아버지는 장삿길로 들어서려고 이사 준비를 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오른쪽 팔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네요.

송씨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었을까요? 그는 “물 따라가다가 마땅치 않으면 강가에서 채소나 지어 먹겠다”고 소원을 밝힙니다. 한강 하류의 나루터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여의찮으면 농사를 짓겠다는 거죠. 일자리를 잃어도 강을 떠나기 쉽지 않은 사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신천나루는 1972년 6월 20일에 폐쇄되었습니다. 1971년만 해도 12명이던 사공이 다리 준공을 앞두고 서서히 떠나 폐쇄될 때는 5명만 남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송씨가 혹여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찾아 떠난 한강의 하류도 조만간 나루가 없어질 건 분명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숙이 아버지는 신천나루에서 가장 오래도록 배를 탄 사공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는지 여러 기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언급됩니다. 동아일보 1972년 12월 29일의 ‘1972년 주역을 찾아. 신천 마지막 뱃사공 김용태씨’ 기사에도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잠실대교 준공 6개월 후였지요.

김용태씨, 숙이 아버지는 성수동의 한 규석 분쇄 공장의 인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잠실섬 토박이로 태어나 25년간 뱃일만 해온 신천나루터의 마지막 뱃사공이었던 그가 삿대를 잃고 돌 부수는 인부가 된 거죠. 

이 기사는 도시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사공들이 나루터를 떠나가는 현상을 언급하며 당시 한강 나루터들의 운명도 예언합니다. 나루터는 물론 뱃사공까지 사라질 것이라는 기사의 예언은 오래지 않아 이뤄지고 말았습니다. 

영동대교와 강 건너 청담동. 뚝섬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사진=강대호

기술 발전이 가져온 일자리 변화

현재 서울 권역의 한강에는 31개의 교량이 있습니다. 서울시 안에 22개가 놓였고, 경기도에 있거나 서울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위치에 9개의 다리가 놓였지요. 이는 다리가 건설된 곳 대부분에 있던 나루터가 사라지고 뱃사공들이 일자리를 잃은 걸 의미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세상의 변화를 불러왔고 일자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I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역까지 넘보고 있는 형국이고요.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의 언론 AI 때문에 사라진 과거의 직업인들을 다루는 기사를 내보낼 게 분명합니다. 

어쩌면 거기에 의사나 법조인 같은 전문가는 물론 예술가까지 포함될는지, 심지어 그 기사를 AI가 작성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런데 잠실을 떠난 뱃사공 송씨와 숙이 아버지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숙이가 무사히 자랐다면 이제 예순 줄에 들어섰을 텐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한강 연안에 닥친 변화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한남동 한남역 인근의 ‘한강 나루터’ 표석.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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