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피난민 살던 부산 소막마을, 문화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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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피난민 살던 부산 소막마을, 문화재 된다
  • 김현민
  • 승인 2018.02.2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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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소 검역소…화가 이중섭 가족 살고 부산 밀면 탄생한 곳

 

1950년 12월 함경도 흥남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추위를 피할수 있으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살았다. 소 축사도 좋았다. 일제가 조선의 소를 수탈하기 위해 부산항 근처 우암동(洞)에 만들어 놓은 소막사가 피난민들을 맞았다. 소 냄새가 나건 말건, 그들은 그곳에서 살았다.

문화재청은 27일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이 근대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고 예고했다.

 

▲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문화재청 제공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에 ‘소막 마을’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골목 사이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많은 집이 연탄불을 때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한다. 마을 입구에는 연탄과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가 있다.

소막마을은 소 막사에 사람들이 들어가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출발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조선 소를 대량으로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제는 부산항에서 배에 싣기 전에 소가 전염병에 걸렸는지를 검사하기 위해 이 곳에서 검역을 실시했다.

우암동 검역소는 1909년에 설립되어 이출우(移出牛) 검역소라 했다. 1909년 처음엔 5개 동의 소막사를 지었다가 나중에 19개 동으로 확장되었다. 소 막사의 크기는 폭 10m, 길이 40m 내외. 각 막사에 50~60마리 내외의 소가 수용됐다. 꽉 채우면 100마리 정도 수용할수도 있었다.

 

해방이 되고 더 이상 우리 소가 반출되지 않게 되자 소막사는 텅 비게 되었다. 그후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소 막사에 들어와 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소막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은 6·25 당시 흥남철수 이후다.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자, 부산 임시정부는 임시방편으로 시내 곳곳에 비어 있는 건물들을 활용해 피난민을 수용했다. 일제가 비워놓고 떠난 우암동 소 막사는 그중 가장 많은 피난민을 수용했다. 당시 이 일대는 ‘적기 피난민수용소’로 불렸다. ‘적기’(赤崎)는 우암리의 일본식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바다에서 우암리를 바라보면 붉은 색의 산이 보인다고해서 아카사키(赤崎)라고 부른 것이 그 유래다.

소막사 한 동에는 40가구 정도가 들어갔다. 한 가구당 허용된 공간은 4평 남짓. 마땅히 경계가 없어서 합판을 이용해 임시로 가구를 분리했다. 피난민들은 보따리 하나만 간신히 들고 내려왔고, 조금만 버티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 막사에도 들어가지 못한 피난민은 건너편 산비탈 공동묘지에 터를 잡아야 했다.

화가 이중섭도 소막사를 거쳐 갔다. 이중섭은 1950년 12월 10일,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이영진와 함께 원산항에서 배를 타고 3일 후 부산에 도착했다. 이중섭 가족은 이 소막마을 수용소에 살았다.

소막마을은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도 언급된다.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준석(유오성 분)은 본적을 말하라는 판사의 말에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라고 대답한다. 곽 감독의 아버지 곽인완(82)씨가 바로 우암동 189번지 소막마을 출신이었다.

소막마을 입구에 있는 ‘내호냉면’이라는 음식점은 1952년에 개업해 6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함경도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정한금 할머니가 흥남철수 때 부산으로 피난와 현재 위치에 내호냉면을 열었다. 상호는 고향인 ‘내호리’를 딴 것이다. 할머니는 냉면을 뽑으러면 메밀이 필요했는데 전쟁 통에 메밀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가루를 섞어 면을 뽑았다. 밀면의 시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소막마을은 인근 지역에 조성된 공장, 항만 등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소막마을엔 6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60여년째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 마을은 2015년 ‘문화복합형 주거환경관리사업’ 사업대상지에 선정되었다. 약 30억 원의 사입비가 투입돼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소 막사를 복원해 부산의 피난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 마을을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

 

항일독립 문화유산 5건도 문화재 등록예고

 

문화재청은 이외에도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 「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 「윤동주 친필원고」,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 「장효근 일기」 5건에 대해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문화재청은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열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항일독립 문화유산들을 적극 발굴하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항일독립 문화유산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 /문화재청 제공

 

①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1945년 8월 17일까지 개최한 정기회와 임시회 회의록 등이 포함된 자료이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네 차례 역임한 홍진(1877~1946)이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1일 환국할 때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고, 홍진이 별세한 이후 유족들이 보관하다 1967년 국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문서는 임시의정원이 생산한 기록물 중 현존하는 귀중한 원본 자료로, 임시의정원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활동내역과 변천 과정 등을 알 수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국제연맹 제출 조일관계 사료집 /문화재청 제공

 

② 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편찬한 최초이자 유일한 역사서로, 조선총독부 등에서 발간하는 일제의 선전물이 식민통치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책은 한일관계사를 삼국 시대부터 연대별로 다루어 일본의 침략성을 실증하고, 경술국치 이후 식민탄압의 잔혹성과 3.1운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등을 포함하여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100질이 만들어졌으나, 현재 국내에서 완질로 전하는 것은 독립기념관 소장본이 유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윤동주 친필 원고 /문화재청 제공

 

③ 윤동주 친필원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유일한 친필원고이다. 개작(改作) 등을 포함하여 시 144편과 산문 4편이 쓰여 있는 「윤동주 친필원고」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와 같이 개별 원고를 하나로 묶은 시집 3책과 산문집 1책, 낱장 원고 등으로 되어있다. 윤동주의 누이동생인 윤혜원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인 강처중,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유족의 손을 거쳐 2013년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기증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육사 친필 원고 ‘편복’ /문화재청 제공

 

④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이원록, 1904 ~1944)가 남긴 시 ‘편복’의 친필원고로,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대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형상화하였다. 당시 ‘편복’은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했으나, 해방 후인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중량 있고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편복’의 친필원고는 유족들이 소장해오다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기증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하였다.

 

▲ 장효근 일기 /문화재청 제공

 

⑤ 장효근 일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장효근(1867~1946)이 1916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한문체의 일기이다. 장효근은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萬歲報) 등의 창간과 발행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3.1운동이 추진되던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 2만여 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족들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그의 일기에는 일제강점기 사회상과 국내외 정세,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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