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발견] 1. 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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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발견] 1. 들어가기
  • 주우(宙宇)
  • 승인 2018.02.2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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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宙宇)의 ‘붓다의 발견’을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지금까지 대다수 전쟁에는 종교가 개입되어 벌어졌으나 불교는 전도(傳道)과정에서 무력과 강제가 개입되지 않은 유일한 종교라는 측면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유구한 전통의 불교가 체계적인 줄 알았는데, 상당 부분 구조적인 모순이 보여서 실망도 했고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시선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보편적으로 관찰하고 궁구해서 제대로 기능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가끔 불교와 관련된 정보를 접하면서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무아(無我)라고 하면서 왜 만물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까?

체험으로도 기쁨 ‧ 행복도 있는데 깨달았다는 분인 붓다께서는 왜 ‘일체가 고(苦)’라고 할까? 불가에도 무위(asaṅkhata)가 있는데 노자의 무위(無爲)와는 과연 다를까?

제대로 안다면 신통하게 된다는 사념처에 관련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게 설명하는 사람이 왜 없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언급하신 ‘자등명 법등명(自洲 法洲)’이라고 하는데 법등명은 짐작되는데 ‘자등명’은 뭘 뜻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는 이유가 뭘까?

법(法)을 따르라고 하지만, 법에 집착하지도 말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저는 불가에서 애써 외면해오고 외면하려 하는 이런 부분에 집중해서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적용한다면 붓다 당시의 시대상을 비추어 지금의 현실 상황도 돌파해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시종여일(始終如一)하고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이야기를 하신 붓다께서 이중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앞뒤가 일치되지 않는 듯한 내용과 해석들이, 특히나 중요한 부분에 빈번히 보입니다. 저는 붓다의 오류가 아니라 번역이나 설법하시는 분들의 오류라고 확신합니다.

경(S20:7 A2:46)에 ‘북에 쐐기를 덧대면서 거듭 수리하다 보니 원래 본체는 사라져버리고 덧댄 쐐기만 남게 되듯이, 미래의 수행자도 여래(如來)가 설한 경전이 심오하고 출세간적(lokuttarā)이며 공(suññata 空)에 상응하나 (손쉬운 방편으로 담마를 제시하다 보니 붓다의 원뜻 자체는 사라져서) 잘 듣지도 귀 기울이지도 마음에 새기지도 않고, 담마를 잘 이해해서 숙달하려고 사유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도(外道)(특히 용수에 대해선 181쪽 참고)가 설한 경에 대해서는 상반된 태도를 보일 것이다.’고 하며, 경(S16:13)에 ‘정법(正法)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은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붓다의 말씀보다 왜곡된 말을 더 숭상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고지혈증 ‧ 고혈압 ‧ 골다공증 ‧ 당뇨 등으로 고생하는 이유는 단 하나, 소위 대사증후군(저혈당)을 일으키는 도정한 백미(백밀)를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살이에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도 단 하나, 붓다의 말씀대로 탐진치(貪瞋痴)를 일으키는 오온인 몸 ‧ 물질 ‧ 재산 ‧ 생각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오온을 욕망하고, 마음이 욕망 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 결과는 고苦입니다. 설사 자신이 괴롭지 않다고 여긴다 해도 이것은 진통제 덕분에 통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사실상 삼계(三界)라는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자유롭다고 여깁니다.

붓다는 인간존재를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세상에서 뜻을 이루려는 세간의 삶이 있고, 고苦의 세상보다 수행을 업(業)으로 삼는 출세간(lokuttara 出世間)의 삶이 있습니다. 사실 붓다의 가르침은 세상이 살만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아니라 세간에 대한 욕심과 원망을 내려놓고 밑바닥을 체험하려 하는 수행자에게 적합합니다. 그렇다고 세간의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기적으로 괴로워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붓다를 따른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지 붓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마를 실천해서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실천보다 지식을 축적하려는 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책도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단지 담마를 알아보려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활동한 국가가 로마의 식민지였듯이 붓다가 성장한 국가도 사실상 코살라의 식민지였습니다. 저도 아직 독립하지 못한 해방된 국가에서 사는 구성원으로서 홀로선 인격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연중에 주인의식이 없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식민지인처럼 행세하는 덕택에 우리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며 선택하는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그만큼 내면 깊은 곳에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우리의 뜻대로 하지 못해서 서럽다는 생각이 몸에서 꿈틀댑니다.

경(M3)에 ‘담마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고 합니다. 이는 ‘붓다가 드시고 남은 음식을 배고픈 제자에게 권유한다 하더라도 담마의 상속자가 되려면 그 음식을 받아먹기보다는 붓다가 바라는 초월(탈바꿈)하는 자로 홀로서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육肉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면 어린이의 의존 상태를 졸업하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외부의 힘(가피(加被))에 의존하는 기복적 신앙(노예도덕)을 졸업하고 자기 내면의 힘을 깨닫게 되는 홀로서기(주인도덕)가 되도록 해줍니다. 행복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질 자격을 갖추고 결국 기대하지 않는 기쁨의 삶이 됩니다.

경(M75)에 “그에게 눈이 생겨나 ‘오랫동안 속고 기만당하고 미혹되었다.’며 분노와 적의를 불태우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오취온(五取蘊)에 생각이 속은 것이지만, 중국을 통해서 들여온 기존 불교 가르침에 속은 것을 안다면 비슷한 심정이 되리라고 봅니다.

만일 인생의 목적지가 해탈 ‧ 열반이라는 깨달음이 아니라면, 목적지가 집단으로서 종교라면 이 책은 도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방해가 되며, 불편한 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 양심 ‧ 수치심이 없다면 이 책뿐만 아니라 삶에서 항상 주어지는 기회도 놓쳐버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우주’는 (특정인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보편적 신인 범신(汎神)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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