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先人)들의 독도 인식과 항해②…이정표와 피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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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先人)들의 독도 인식과 항해②…이정표와 피항지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18.02.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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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이름 羽淸島…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의 맑고 푸른 섬

 

3. 선인들의 독도 항해

 

일본에서 울릉도·독도를 주로 항해하는 곳은 오키섬, 시마네현, 돗토리현의 해민들이 주로 다녔는데, 울릉도를 항해하면 독도는 이정표와 피항지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울릉도를 다니면서 해산물과 산림자원을 채취하였는데 후에는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주로 하였다.

독도는 우리나라 동해안에서는 울릉도가 먼저 보이므로 독도를 보기 쉽지 않다. 북쪽의 함경도 쪽에서는 가을철에 북서풍을 타고 남동쪽으로 항해하거나 강원도 쪽으로 이동하여 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반대로 귀항할 때는 남동풍이나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남쪽의 경상도, 전라도에서는 봄·여름철의 남동풍을 이용하여 북동쪽으로 항해하고 가을철에 북서풍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다 동해상을 지나는 저기압이나 태풍의 영향으로 폭풍을 만나게 되면, 먼저 돛을 내리고 파도에 전복되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다 방향을 잃고 바람의 방향이나 해류를 타고 표류하게 된다. 다행히 폭풍이 멎어 날이 개어 성인봉(984m)을 찾으면 방향을 잡아 목적지로 올 수 있다. 그러나 센바람이나 태풍을 만나 멀리 이동하여 해류를 타게 되면 식수와 식량이 있을 때 까지 표류하는데 동해상에서 표류하면 일본, 러시아까지도 갈 수 있다.

 

▲ 독도의 일출 /사진=이효웅

 

1108년 일본사 고려전(日本史 高麗傳)에 의거하여 우릉도인(芋陵島人)이 이나바(因幡:鳥取県)에 표류하여 비용과 식량을 공급해주고 본국에 돌려보냈었다는 명문이 있다. 그리고 주에 그 인용한 서적을 들어 권기(權記) 및 이조려초(李朝麗草)라고 하였다. 또 공임집(公任集)을 인용하여 "신라 우루마도 사람이 이르렀다. 우루마도는 곧 芋陵島(울릉도)이다."라고 하였다.(1881년 竹島考證 3권과 竹島版圖所屬考)

우릉도(울릉도)에서 표류하여 일본 돗토리현으로 갈 때는 독도를 지나야 갈 수 있다. 갈 때는 일기가 나빠서 못 보았을 수도 있지만 회항할 때는 일기가 좋은 날 출항하므로 반드시 독도를 스쳐 지나거나 들릴 수도 있다.

1425년(세종7) ‘무릉도(茂陵島)에 들어갈 때 바람 때문에 표류했던 수군(水軍)인 평해(平海) 사람 장을부(張乙夫) 등이 일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처음에 수군 46인이 한 배에 타고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를 수행하여 무릉도를 향해 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지면서 같은 배에 탔던 36인은 다 익사(溺死)하고, 우리들 10인은 작은 배에 옮겨 타서 표류하여 일본국 석견주(石見洲)의 장빈(長濱)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여 멀리 일본 시마네현까지 표류하였다가 돌아왔고, 반대로 1777년(정조2)에는 일본 토원군 해민 17명이 추전(아키다)지역에 쌀을 사러 갔다가 약1,000km 떨어진 삼척까지 표류하였다가 돌아갔다.

 

최근 북한 어선들은 연료 부족 상태에서 어로활동을 하다가 가을철의 강한 북서풍을 만나 대부분 동쪽으로 밀려 대부분 일본의 북서쪽으로 표류한다. 선인들의 배는 돛과 노를 이용하므로 어느 정도 살아날 가망이 있지만 오늘날 어선은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바람이 멎으면 느린 해류를 타고 한없이 흘러 다니다 대부분 아사 및 동사를 하게 된다. 북한의 어선이 일본에서 발견되는 건이 연중 수백 건이라고 하며 그 중에서 운 좋은 생존자는 몇 사람 밖에 안 된다. 울릉도 대풍감 인근에서 발견된 북한 선박(2018.1.8.)은 선원 4명 모두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동해상에서 표류하다 보면 독도를 발견하는 선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어선들은 연료가 떨어지면 독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멍텅구리 선박들이다.

울릉도·독도 근해에서 표류하다 보면 쿠로시오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갈 수 있고 반대로 동해안으로 다시 돌아 올 수도 있다. 대부분의 쿠로시오 해류는 일본 서해안으로 가는데 운 좋게 작은 섬인 독도를 만날 수도 있다. 이 섬에는 샘과 동굴이 있어 식수와 비바람을 해결할 수 있고,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강치와 같은 포유류가 있어 식량을 해결 할 수 있다. 또한 섬에 올라 북서쪽의 울릉도를 찾을 수 있고 방향을 잡아 귀항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독도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은 독도를 울릉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이야기할 뿐 다시 갈 수 없는 전설의 섬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과장되어 조선 초기에 요도, 삼봉도와 같은 전설의 섬 찾기에 이르렀다.

이런 이야기는 함경도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도 전해진다.

숙종실록 22년(1696년 9월25일) 안용복은,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안용복은 1693년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두 번째는 ‘울릉자산양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내쫓고, 그 길로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하게 항의하여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는 확약을 얻어냈다. 여기에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는 시마네현 오끼의 송도(마츠시마:독도까지 거리는 약 170km)라고 생각하는데, 안용복은 당시 일본사람들이 부르는 송도(독도)는 자산도(子山島)로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였다. 안용복의 자산도(子山島)는 울릉도의 자식(아들) 섬으로 알고 있었거나 우산도(于山島)를 잘못 알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는 오끼의 마츠시마(松島)를 말하는지, 아니면 당시에는 독도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도(松島)라 부르는지 분명하지 않다.

필자는 안용복이 ‘송도(松島)는 울릉도의 자식섬(자산도)으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고 하여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일본인들에게 큰소리를 질러 내쫓았다. 그것은 경상도나 전라도 해민들은 이전부터 독도에 가 보았거나 독도 이야기를 해민들 사이에 전해져서 알고 있었다고 본다.

 

▲ 독도 해상에서 해류병 던지기 /사진=이효웅

 

또 다른 예는, 필자가 2002년 자작보트인 코스모스호로 독도탐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삼척군지를 살피던 중 윤속 부사의 우청도(羽淸島) 이야기를 알게 되어 울릉군 홈페이지에 소개하여 매스컴에 보도된 적이 있다.(매일신문, 2002.12.18)

삼척의 옛 기록인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윤속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중 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가 없어 병진년(1796년) 7월 상경하여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번 복귀를 재촉하는 교지를 내렸지만 굳게 사양하여 임금의 뜻을 거부하다 파직 당했다. 이에 윤속은 우릉(羽陵)의 팔륜아사건(八倫兒事件)의 벼슬에 나갔고 벼슬에 나가서 사정을 하소연하는 글을 올렸다. ‘우청도(羽淸島)는 망망(茫茫)한 바다 가운데 있어 그것이 삼척지방(三陟地方)에 소속(所屬)되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윤속 부사에 관한 내용은 향토지에 실린 내용과 정조실록(정조19년:1795년)에 실린 내용이 많이 다르나 필자가 사건을 추론해 보면, ‘우릉의 팔륜아사건’은 윤속 부사 부임 이전 1787년(정조11년)에 울산 해척(海尺)들이 울릉도에 가서 어복(魚鰒)과 향죽(香竹)을 몰래 훔쳐 나오다 삼척부에 붙잡혀서 취조하는 과정에서 우청도(羽淸島) 이야기가 나왔다고 본다.(추잇돌, 최잠돌 격군 등 14명)

‘우청도(羽淸島)는 망망(茫茫)한 바다 가운데 있어 그것이 삼척지방(三陟地方)에 소속(所屬)되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는 내용은 해척(해민)들 사이에는 예전부터 울릉도를 다니면서 동쪽바다의 우청도(독도)에도 다녔는데, 그곳은 강원도 삼척에 소속된 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우청도(독도)를 몰랐고 이 사실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져 보고되지 않아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빠졌으나 향토지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삼척영진은 오늘날 동해1함대와 같이 강원도 동해안 9개 지역과 울릉도·독도를 관리하였다. 울산의 해척들은 울릉도와 우청도(독도)가 삼척 관할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멀리 울릉도·독도를 몰래 다니면서 어복과 향죽 등을 잡고 채취하러 다녔다.

필자는 우청도(羽淸島)의 우(羽)란 두 개의 섬이 멀리서 보면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보이고, 청(淸)은 실제로 독도에 올라보면 동도와 서도 사이가 2-3m정도로 얕아 맑고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양 날개를 펼친 맑고 푸른 섬’이라고 풀이하였고, 독도의 여러 이름 중에서도 우청도(羽淸島)가 가장 멋진 이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창간된 민국일보 1962년3월19일자 돌섬(석도:독도)의 기사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거문도에 사는 87세의 김윤삼 노인은 20세(1895년)에 무역선 5-6척으로 원산-울릉도-부산, 쓰시마를 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울릉도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었는데 화창한 날에는 동쪽바다 아득히 섬이 보여 나이 많은 뱃사람에게 물어보니 돌섬(석도:독도)이라 하였다. 김치선 할아버지 때부터 그 섬에 가서 강치를 잡으러 다녔는데, 이틀 걸려 약 200리 되는 돌섬에 도착하여 10일 넘게 머물면서 강치도 잡고 미역이나 전복 등을 채취하여 부산이나 쓰시마에 가서 팔았다고 한다.

 

▲ 독도 물골의 식수탱크 /사진=이효웅

 

이와 같이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에서는 독도를 보기 어려우나 함경도나 경상도·전라도에서 항해하면 독도를 발견하기 쉽고 가기도 쉽다. 일찍이 해척(해민)들 사이에서는 조선 초부터 독도의 사실들이 많이 알려져 있었고, 특히 안용복은 독도를 지나 일본에 건너가서 자산도(송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막부의 확약을 얻어 내었으며 이후 약 190년간 일본인들의 출입을 근절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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