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의 페르시아인…국제화된 신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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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릉의 페르시아인…국제화된 신라의 모습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1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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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한 눈자위, 매부리코, 곱실한 수염, 주걱턱…영락없는 서역인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쿠데타로 임금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성왕(元聖王)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내물왕 12대손이다. …

선덕왕(선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후에 왕의 족자(族子, 친족) 주원(周元)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敬信)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경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삼국유사」에도 원성왕의 즉위과정이 나온다.

 

얼마 뒤 선덕왕(宣德王)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은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궁궐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집이 북천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주원을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와서 따르며 새 왕에게 절을 하고 축하하였다. 이가 원성대왕으로 이름이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삼국유사」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정리했다. 두 역사서를 종합하면, 원성왕은 임금이 되기 전에 주원과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선왕(선덕왕)이 갑자기 죽자 왕궁을 점령하고 차기 임금으로 예정된 주원의 세력을 제거하고 임금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신라 김씨 가운데 내물왕 후손들이 왕위쟁탈전을 벌인 스토리의 단면이다. 이후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신라의 왕위는 원성왕 계열로 14대를 이어가게 된다.

 

▲ 페르시아인 모습의 원성왕릉 무인상 /사진=김인영

 

원성왕은 52대 효공왕까지 신라말기 왕조의 시조격이다. 후손들이 130년간 14대에 걸쳐 임금이 되었으니, 그의 무덤이 잘 꾸며져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경주에 가면, 우리에게 괘릉(掛陵)으로 더 잘 알려진 무덤이 원성왕릉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에 그동안 괘릉으로 불리운 왕릉의 명칭을 원성왕릉으로 변경했다.

왕릉 주변엔 소나무가 일품이다.

 

▲ 원성왕릉의 소나무 숲 /사진=김인영

왕릉은 원래 작은 연못이 있던 자리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능의 내부 현실(玄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掛) 놓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원성왕릉 봉토분 /사진=김인영

 

원성왕릉은 통일신라시대 왕릉 가운데 가장 발달한 능묘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의 석물(石物) 배치나 조성기법도 훌륭하다. 봉분 앞에 세워진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護石)이 1.4m 높이로 설치되어 있다.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왕릉 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다. 석물들은 동서로 약 28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 페르시아인 모습의 원성왕릉 무인상 /사진=김인영

 

이중 무인석은 박진감이 넘치며,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페르시아인의 얼굴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인은 걷어올린 윗옷 아래로 굵은 팔뚝의 근육까지 생생하다. 깊숙하게 골이 파인 눈자위, 커다란 매부리코, 곱실거리는 수염, 주걱턱의 모습은 여느 동양인과는 다른 서역인의 모습이다.

원성왕 재위시절인 8세기 말에 신라가 당나라와의 교역에서 벗어나 아라비아반도의 서역인과의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이방인의 모습에서 국제사회의 중심지로 자리했을 경주의 위상을 느끼게 한다. 이같은 서역인의 모습은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 원성왕릉 문인상 /사진=김인영

 

1쌍의 문인석도 그 늠름한 모습이 다른 능묘의 문인석에서 느껴지는 나약함과는 다르게 강건한 점이 인상적이다. 또 무인상과 문인상이 입고 있는 옷의 조각도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 신라의 복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괘릉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는 힘이 넘쳐 한 발은 땅을 짚고 한 발로는 땅을 파헤치고 있으며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웃음이 가득하다. 각기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 마리씩 마주보고 있는 사자가 몸체는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자기가 지키고 있는 방위를 향해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두 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으로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 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의 생동감 넘친다.

 

그동안 이 왕릉이 원성왕의 무덤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삼국사기」 원성왕조에는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은 토함산 서쪽의 곡사, 곧 지금의 숭복사에 있다”고 했는데, 괘릉 인근의 외동읍 말방리에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이를 원성왕릉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숭복사 터가 정확히 토함산의 남쪽에 있으므로 이 능을 원성왕릉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각에선 토함산의 서쪽에 성덕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원성왕릉이고 이 괘릉은 제45대 신무왕의 능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승복사 비문이 판독되면서 이 능은 원성왕릉으로 인정되었다. 문화재청도 학계의 논의를 종합해 2011년 원성왕릉으로 정리했다.

 

▲ 원성왕릉의 사자상 /사진=김인영
▲ 원성왕릉의 사자상 /사진=김인영
▲ 원성왕릉의 사자상 /사진=김인영
▲ 원성왕릉 무인상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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