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 글쓰기 선생] 새벽이슬을 머금은 흙길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설렜다.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부드러운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가슴이 흔들렸다. 흙냄새, 풀 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비릿한 물 냄새가 한꺼번에 안겨 왔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들을 안았다. 그 향기들이 내 몸으로 스며들도록 마음을 열고 몸을 열었다. 흐으음… 코로 깊숙이 들이마시며 가라앉아 있던 나를 깨웠다. 어릴 적 나의 몸과 마음을 드나들며 나를 키워간 익숙한 이 냄새들.
여의도 샛강에는 겨울을 난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앙증맞은 새끼오리들은 얼마나 경계심이 강한지 낯선 시선만 감지돼도 초고속 스피드로 줄행랑을 놓았다. 약한 존재의 본능일까, 교육의 힘일까?
엉덩이만 내놓고 자맥질을 하며 먹이를 잡는 어미 오리가 갸륵해 보였다. 추운 겨울 동안 저들은 저렇게 새끼들을 낳고 기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구나. 어미 아비의 사랑이 그네들이 만드는 잔물결처럼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샛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은 겨울에서 봄으로 조금씩 빛깔을 바꿔가고 있었다. 내 마음의 겨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았다.
일곱 달 만에 처음으로 길 위에 섰다. 한 주만 더 참았다 운동하라는 의사의 말을 어기고 말았다. 거실 가득 들어앉아 시위를 하고 어깨 위에 내려앉아 나가자고 칭얼대는 봄볕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 따뜻하고 투명한 빛을 느끼는 순간 나는 이미 나가야 할 명분을 만들고 있었다. 봄볕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변화를 빨리 느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쩌면 나는 큰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수술을 할 때, 의사는 세 달이면 가볍게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웬만한 트레킹도 가능하다고 장담했다. 그래서, 무릎을 동여매어 놓는 보조기도 투덜거림 없이 기꺼이 착용했다.
잠을 잘 때도 무거운 보조기를 매달고 자야 했다. 빨리 낫는다면야 무엇인들 못할까? 그래봐야 한 달 아닌가?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는 절대 안정을 당부했다. 그러나 3주쯤 지날 무렵, 엄마 아버지가 덜컥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내 몸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 다리로 시골을 오르내리며 두 분을 챙겨야 했고, 독서교실 일에 집안일까지, 몸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노력도 부질없이, 아버진 돌아가셨다. 장례식 치르고 정신 차려서 49재 치르고 나니 어느새 겨울이었다.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 계속 부어 있는 무릎을 의사는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능한 움직이지 말고 틈틈이 얼음찜질 좀 해주세요. 소염제 꼭 챙겨 드시고.”불룩한 무릎에서 물을 빼고 주사를 맞는 일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한의사인 제부가 보내준 한약도 꼬박꼬박 열심히 챙겨 먹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다리 때문에 내 생활도 염증이 도지는 것처럼 예민해지고 삐거덕거리고 무기력해졌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정규수업에 특강까지 늘었다. 영어, 수학 학원을 바꾸거나 수업 시간이 바뀌었다며 논술수업 시간 조정을 요구하는 문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갑자기 이사를 가거나 그만두는 아이들도 적잖았다. 여행을 다녀오는 아이들은 따로 시간을 내어 보충을 해주다 보니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특히나 정들었던 아이들과 헤어지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다. 벌써 25년 넘게 논술 선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떠나는 날은 괜한 자괴감과 허전함으로 마음이 어두웠다. 그런 날은 맥주라도 마시지 않으면 편하게 잠들 수 없었다. 하여튼 나는 쉽사리 맺고 끊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아, 빨리 가라! 겨울아, 빨리 가라! 겨우내 빌고 또 빌었다. 2월 중순이 넘어서면서부터 무릎은 조금씩 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염증은 나타나질 않아요. 그러니 이때 다잡아야 해요. 조심, 또 조심하세요.” 의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또 주사를 맞고 나오면서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이제 곧 3월이 오겠지…
2월 말에 기어코 몸살이 왔고, 한 움큼 약을 먹으며 3·1절엔 온종일 보충 수업을 했다. 그리고 진짜 3월이 왔다. 며칠 전부터 생각했다. 제일 먼저 어디를 갈까? 그리고 내린 결론, 봄이 오고 있을 샛강으로 가자.
버들강아지가 보고 싶었다. 통나무와 짚을 엮어 만든 작은 다리를 건너 뽕나무, 느티나무 늘어선 길을 걸었다. 작년 홍수 때 혼이 난 탓인지 오솔길은 조금 더 넓히고 길가는 벽돌로 단도리해 놓았다. 참새 떼들이 길 가운데로 우르르 몰려왔다 우르르 날아가곤 했다. 마음이 덩달아 가벼워졌다.
팔뚝만 한 붕어·잉어들이 모여 사는 연못을 지나, 수달이 산다는 실개천을 지나, 영등포에서 여의도로 이어지는 다리 아래를 지나 나는 개천을 따라 만들어진 데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눈으로는 열심히 땅바닥을 훑었다.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며 포슬포슬해졌을 땅을 뚫고 어떤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을까?
기세 좋게 두 팔을 쫙 벌리고 있는 냉이, 손톱만 한 여린 잎을 내민 봄 쑥, 노란 꽃을 밀어올린 꽃다지들이 신입생 꼬맹이들처럼 쉼없이 바닥에서 재잘거렸다. 흰색, 회색 해오라기 두 마리가 샛강 위로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겨울 동안 삐걱거리던 나무 데크는 튼튼한 쇠기둥과 튼튼한 새 나무 데크로 바뀌어 있었다. 데크 안쪽으로 동글동글한 버들강아지를 매단 버드나무가 기지개를 켜며 나를 반겼다.
버들강아지가 피어난 지 한참 됐는지 노랗게 꽃가루를 매단 아이들도 있었다. 손을 뻗어 가만히 만져 보았다. 보드랍고 매끈한 버들강아지의 감촉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모나고 거칠어져 있던 마음이 금세 버들강아지처럼 변해 갔다.
데크 쪽으로 뻗어 나온 가지에 얼굴을 대어보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 “너, 힘들었구나. 고생 많았어.” 그 아이들이 가만가만 나를 위로해 주었다.
보호대를 하긴 했지만 아직은 뻑뻑한 무릎을 살피며 나는 요트 선착장까지 걸었다. 줄지어 선 미루나무와 연두 이슬처럼 맺혀 있는 조팝나무 새싹이 방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행여 떨어질세라 나는 조심스레 새싹을 어루만졌다. 내 속에 연두색 물이 스며들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한강가 나무 의자로 가 앉았다. 당산철교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먼 길을 흘러온 한강이 만나 재회를 하는 곳. 툭 트인 한강 물을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 넣어 온 커피를 꺼내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 갑자기, 울컥, 그리운 이들이 떠올랐다. 내 힘든 겨울을 함께 해온 이들. 그들에게도 겨울이 있었겠지.
누구나 숨쉬기조차 힘든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게 무엇일지, 언제일지 예측할 수는 없다. 힘들다는 거, 슬프다는 건 마음이 겪어내야 하는 일이니 현실로 닥쳐왔을 때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한다.
그때 희망이 없다면, 내 손 잡아주는 이 없다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 혼자였다면 어두운 터널 같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늘과 물과 땅이 하나 되는 곳에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죽으면 썩을 놈의 몸이라며 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일, 젊은 육신이 영원하리라 여겼던 오만을 후회했다. 그리고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봄 햇살 같은 아이들과 현재라는 시공간을 함께 걷고 있는 이들과 아직은 꿈꿀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 감사하고 더 사랑하기로 했다. 이제 시작이다.
아, 그런데, 하늘의 별 무리가 쏟아진 듯 양지쪽에서 파란 봄까치꽃들이 피어나 나를 응원하는 것이 아닌가! 녹두 크기만 한 봄까치꽃들. 봄꽃 환하게 깔린 샛강 길을 걸어오며 내 맘에도 봄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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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쓴 글을 읽으며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많이 부럽습니다. 건강 잘 챙겨가며 행복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