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의 간양록…임진왜란 피로인의 기록
상태바
강항의 간양록…임진왜란 피로인의 기록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17 1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에 끌려가 절개 굽히지 않은 선비…선조에게 일본 실정 보고

 

“이 곳에 와서 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왜놈들에게 붙들려온 우리나라 남녀의 수가 1천은 넘어 보였습니다. 금방 온 무리들은 떼를 지어 길거리를 헤젓고 다니면서 소리쳐 울며 불며 야단법석을 떨고, 진작에 와서 있던 패들은 돌아갈 길이 막힌 탓인지 거의 왜놈이 다 되어 버린 성 싶었습니다. 몰래 서쪽으로 빠져 나가 보자고 슬쩍 그들을 타일러 보아도 그러자는 놈은 한 놈도 없더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형조좌랑 강항(姜沆)이 적지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는 임진왜란 말기, 이른바 정유재란때인 1597년 전남 영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해로로 피난하려다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는 일본에 끌려가 탈출하기까지 2년 9개월 동안의 체험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원명은 건거록(巾車錄)이라 했다. 건거란 본시 죄인이 타는 수레로, 강항은 자신의 기록을 이렇게 이름지었는데, 윤순거(尹舜擧) 등 제자들이 책명을 간양록(看羊錄)이라고 바꿨다. 간양(看羊)이란 흉노(匈奴) 땅에 포로로 끌려간 한나라 소무(蘇武)가 이국 땅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면서 애국충절을 지켰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다.

「간양록」은 ①‘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에서 올리는 상소 ②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 적중에서 듣고 본 것의 기록 ③ ‘섭란사적’(涉亂事迹) - 난리를 겪은 사적 ④ ‘고부인격’(告俘人檄) - 포로인들에게 고하는 격문 ⑤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승정원에 올리는 계사 ⑥ ‘섭란사적’(涉亂事迹) -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 내산서원 앞 강항 상 /문화재청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태어났다.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 강항 초상화 /영광군청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 소속 정7품 주서를 시작으로 1595년 교서관 박사, 그 다음해에 정6품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고향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있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량 조달 임무를 맡아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그러나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강항은 영광으로 돌아와 격문을 띄워 의병 수백 명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 앞에 의병이 곧 흩어졌고 영광도 왜군에 유린당했다. 강항은 집안 식솔들을 배에 태워 이순신의 진영으로 향했지만 떠난 지 9일 만인 9월 23일에 왜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강항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많은 식솔들이 왜군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그는 왜놈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가던 중에 첩 애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 소회를 이렇게 썼다.

 

왜선 한 척이 지나갔다. 웬 여자가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없소“ 하였다.

둘째 형수님이 나가본즉, 애생의 어머니가 아니냐. 서로 엇갈린 이후 소식을 몰라 벌써 죽었거니 생각했는데, 아직 안죽고 살아 있다니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필경 굶어 죽고야 말았다. 외쳐 부르던 소리 아직도 창자를 에인다. 날마다 밤마다 울고불고 몸부림치는 그를 왜놈들은 두들겨 팼으나 두들겨 패는 것쯤으로 잦아들지 않았다. 애생의 어미는 몸부림치다가 그대로 굶어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그 후에 나는 들었다. …

가련이는 둘째 형의 아들이다. 올해 여덟살이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갯물을 들이켰는데, 그 길로 병을 얻어 토하고 설사하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이놈들 봐라! 앓는 놈을 안아다가 물 속에 내 던졌다.

“아버지! 엄마! 아버지! 아버지! 부르다 부르다 겨워 그 소리마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아비가 소용 있나. 어미가 소용 있나. 네 죽음을 멍하니 보고만 있는 아비가 아니냐, 어미가 아니냐.

 

첩 애생의 애닯은 목소리, 조카를 죽이는데 어쩔수 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형과 형수,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글로 담아 4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생생히 전하고 있다.

 

강항은 쓰시마 섬과 이키(壹岐) 섬 등을 거쳐 시코쿠(四國) 이요(伊豫)의 오즈(大洲)성으로 끌려갔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서도 복수의 일념을 불태웠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8일 동안 먹지 않았으나 오히려 숨이 붙어 있음이 한스럽다. 그러나 죽지 않은 것은 장차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 의미 없이 죽는 것은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양(豫讓)은 비수를 갖고 다리 아래 엎드려 조맹(趙孟)에 대해 원수를 갚기로 기약했고, 철퇴를 들고 모래밭에 나타나서 장량(張良)의 분을 씻기로 맹세했다.

 

그는 수차례 탈출을 시도한다. 일본 승려에게서 배편 제공을 약속 받고 조선인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햇으나, 어느 계곡을 지나다가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에게 귀국을 부탁하다가 들켜 어려운 입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도 들고 본 내용을 정리해 선조에게 보고했다 강항은 일본의 지리 및 지세, 관호, 군제, 형세 등을 상세히 기록해 탈출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통해서 조선 조정에 전하려 했다.

 

▲ 영광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 건거록(간양록) 등 문적 일괄 (시도 유형문화재 288호) /문화재청

 

▲ 번역본 간양록

그는 교토 후시미(伏見)성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곳에서 약 1년 8개월을 지내고 풀려나 1600년 5월 19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들, 뱃사공과 그 식솔 등 모두 38명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귀국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가서 편전 앞에서 술상을 받고,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고향 영광으로 향했다. 선조는 강항에게 일본 현지 상황에 관해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고향에 도착한 강항은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1602년에는 대구 교수(敎授- 지방 유생을 교육하고 향교를 지도하는 종6품 벼슬)로 임명됐지만 곧 사직했고, 1608년에는 순천 교수에 임명됐지만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도 귀국후에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경계의 눈초리를 받았던 것 같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계(兪棨)는 간양록을 읽고 강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시대와 운명이 서로 마주 비딪고 세상으 인심 또한 봅시 어려운 시절이다. 다시 찾아낸 옥(玉)에서 흠만 찾으려 들고 고운 살결에 흉터만을 꼬집어 내려 한다. 공 같은 고결과 애끓는 심정을 세상에 널리 알려 이를 표창하여 주기는커녕 도리어 깎아 내리려고 매장하려 들었으니, 천하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도 심한 일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많은 사대부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강황에 대해 죄인 취급한 상황이 유계의 글에서 감지된다.

 

1990년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 앞에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건립되었다.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오즈시는 2001년부터 교류하고 있다.

(필자가 읽은 간양록은 이을호 역, 서해문집 출판의 번역본(2005년)이다.)

 

▲ 강항이 배향되어 있는 전남 영광군 내산서원 /문화재청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