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⑩ 송파 가락동은 예나 지금이나 전국 유통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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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⑩ 송파 가락동은 예나 지금이나 전국 유통의 중심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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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송파(松坡)는 소나무 언덕을 의미합니다. 잠실이 아직 섬이었을 때 지금의 석촌호수 남쪽은 한강의 자연 제방이었을 겁니다. 제방은 언덕이었을 테고 언덕은 소나무 숲으로 울창했을 겁니다. 송파라는 지명에는 이렇듯 옛 모습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송파진>과 김윤겸의 그림 <송파환도>에도 송파는 강가 언덕의 숲으로 묘사됩니다. 송파는 한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물길이 지나는 곳,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난 후 한강으로 굽이쳐 들어오는 길목이었습니다. 그곳에 송파나루가 자리했지요. 두 그림에도 송파 강변 앞을 지나는 배가 보입니다. 

북한강은 춘천에서 한양으로 오는 물길이었고, 남한강은 충주에서 여주를 지나 한양으로 오는 물길이었습니다. 두 강은 지천을 통해 강원도나 충청도 등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의 조세곡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조운로(漕運路) 역할을 했습니다. 

이 물길을 통해 목재를 운반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에서 벌목한 목재들을 뗏목으로 묶어 한강 상류에서 흘려보냈는데 송파 인근에서 하역했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면 한강의 물길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송파는 삼남 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육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길로 사람들이 지나기도 했지만, 물품들이 모이기도 했지요. 수로를 통해 올라온 물품들과 육로를 통해 운반해온 물품들이 모이자 송파는 유통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송파에서는 규모가 큰 시장이 열렸습니다. 송파장 혹은 송파장시라고 했지요. 

가락동농수산물시장 앞에 자리한 ‘송파시장 유래비’ 표석. 사진=강대호

한양 시전을 위협했던 송파장시

19세기 초의 기록인 <만기요람>에서 전국 향시 중 규모 큰 15개의 장시를 꼽았는데 송파장시가 포함됩니다. 향시는 보통 오일장이었지만 영조 때 기록을 보면 송파장시는 매일 장사하는 상설시장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한양의 시전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하네요. 

한양에는 허가받지 않은 상인은 상거래를 할 수 없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전 상인들에게 유통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준 거지요. 하지만 송파장은 한양이 아니라 광주부에 속해 있어서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방 상인들은 물론 한양과 한성부 인근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 여파로 한양의 시전 상인들은 상권이 위축되었다고 하네요. 18세기 중반 시전 상인들과 이들의 뒤를 봐주는 관리들 중심으로 송파장을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 이유지요. 

하지만 19세기의 개항은 시전 상인뿐 아니라 조선 상인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천항이 열리며 일본과 청나라는 물론 서양과 증기선을 이용한 해상 운송이 확대되자 송파나루와 송파장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거죠. 급기야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는 송파장시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송파의 한 근린공원에 가면 ‘을축년대홍수기념비’와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건창은 19세기 말의 암행어사로 송파장을 찾아 상인들의 고충을 들어주었고,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 인근 마을이 큰 피해가 났다고 두 비에 적혀있습니다. 을축년대홍수 후 송파장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가락동이나 석촌동의 높은 지대로 옮겨 갔다고 하네요. 

가락동농수산물시장 입구에는 ‘송파시장 유래비’ 표석이 있습니다. 표석에는 과거 송파장시의 유래를 소개하며 가락시장이 “이 고장 옛 전통을 되살려 잇게”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송파장이 있던 곳과 지역적으로 가깝기에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은 태생부터 결이 좀 다릅니다.

1985년에 개장한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은 우리나라 최대의 공영도매시장이라고 홈페이지에서 소개합니다. 그 기록에서 최초라고도 밝혔지만, 시장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의 법정 도매시장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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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경성부 의주통 2정목, 지금의 중림동에 있었던 경성수산주식회사.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27년 조선총독부는 서울역 인근 중림동에 ‘경성수산시장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경성부 산하의 수산물 도매시장이었지요. 1939년에는 청과류로도 품목을 확대해 ‘경성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합니다. 그러니까 식민지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법정 도매시장’을 연 겁니다. 

일제가 유통 관련 법을 만들며 법정 도매시장인 경성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한 이유는 생활필수품인 식품의 도매가격을 관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관련 문헌들을 보면 수수료 수입, 즉 세입 증대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부터 전통이 내려오는 위탁도매상들을 통제할 목적도 있었다고 하네요.

경성수산주식회사는 해방 후에 ‘서울수산물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며 서울시의 수산물 도매유통 업무를 대행했고, 경성중앙청과주식회사는 해방 후 중앙청과로, 1963년에는 ‘서울청과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하며 서울시의 청과물 도매유통 업무를 대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중림동의 도매시장은 해방 후에도 관청에서 관리하는 법정 도매시장이었지요. 

관리 담당도 총독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상공부로 바뀌었는데 1960년대부터는 농수산부와 소관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관청의 통제 아래에 있던 중앙도매시장은 상권이 계속 위축되었고 사설 위탁도매상이 자리 잡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의 상권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중앙도매시장에 입점한 도매상들은 중림동을 벗어날 계획을 세우게 된 거죠.

중림동→용산→가락동으로 옮겨간 도매시장

마침 1960년대 말 만초천을 복개한 원효로에 나진시장이 들어서며 도매상들이 모이게 됩니다. 서울역 서편 청파로와 원효로의 많은 구간이 만초천이 흐르던 곳이지요. 1975년에는 서울시의 청과물 도매업무를 대행하는 서울청과주식회사도 용산으로 이전합니다. 일명 ‘용산시장’ 혹은 ‘용산청과도매시장’의 시작이었습니다.

용산청과도매시장은 1970년대에 서울에서 가장 큰 김장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용산시장 일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용산전자상가로 변했습니다. 나진시장 자리에는 나진상가가, 용산청과도매시장 자리에는 용산전자랜드가 들어섰지요. 1985년부터 입주하기 시작한 용산전자상가 일대는 한때 전자제품의 메카였지만 지금은 옛 명성이 희미해진 듯 보입니다. 그런 용산전자상가 일대는 지금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977년 용산청과물시장에 개설된 김장시장.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용산전자상가가 조성되면서 용산청과도매시장은 가락동으로 옮겨갔습니다. 농수산물 유통시설의 근대화와 유통체계 구조개선 사업의 목적으로 가락동에 유통 대단지가 들어섰고, 1985년에 서울청과 등 용산시장의 도매시장법인과 도매상들이 대거 가락동으로 이전한 거죠. 

오늘날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은 9개의 도매시장법인을 포함해 3300여 업체에서 1만3천여 종사자가 청과물과 수산물을 유통하는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옛 자료들을 보면 가락동농수산물시장과 송파장은 결이 다르게 탄생해 나름의 역사를 겪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송파에 전국의 산물이 모여드는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걸로 보이네요. 그런 면에서 역사는 변화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의 전통을 하나로 묶는 힘을 가진 거 같습니다.

한편, 도매시장이 떠난 중림동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서소문역사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서울역 인근 넓은 땅을 개발하는 대신 공원용지로 묶은 결정은 결과적으로 강남 개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교통 정책에도요. 다음 글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가락동농수산물시장 전경.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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