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1문단④…一積十鉅 無匱化三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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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1문단④…一積十鉅 無匱化三極
  • 주우(宙宇)
  • 승인 2018.02.0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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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됨됨이가 완전한 십(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닦여가는(積) 덕택에, 빈틈없이 완수해냄으로써(無匱) 완벽한 삼극(三極)으로 승화된다(化).

 

積(적)은 앞에서 설명했으며, 鉅(거)는 클 거, 강할 거, 강철 거이므로 쇠를 열처리해서 점차 강한 강철로 담금질해가는 것처럼, 수행을 쌓아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르듯이 단련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쪽에서 설명했듯이 無匱는 빈틈없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서 담마(本)를 완수해낸다는 의미입니다. 無匱와 대구를 이루는 無盡本은 담마(本)를 무시함으로써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말이지만, 대응하는 구절인 不動本은 담마를 존중함으로써 기회를 붙든다는 말입니다.

 

一積十鉅(일적십거) 無匱(무궤) 化三極(화삼극)은 대부분 앞에서 관련 구절을 언급할 때 설명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현실을 펼쳐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 수행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메커니즘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듯이 완전한 十의 상태를 향해 한 단계씩 상승하는 것을 진화·성장이라고 합니다.

세간의 오로(誤路)로 가더라도 삶이 한방에 악화하기 어렵듯이 출세간의 정로(正路)로 가더라도 삶이 한방에 호전되기 어렵습니다. 삶이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듯이 한 단계씩 성장해가는(積) 것은, 내적 존재상태에 따라 펼쳐지는 외부현상이 각각의 단계마다 들어있는 12 연기(緣起)에서 마지막 노사(老死)부터 역관(逆觀)으로 단계를 밟아서 생(生), 유(有)를 거쳐 위(爲), 무명(無明)까지 극복해서 환멸해가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조건 열 계단을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일곱 계단만 올라가도 되므로 사람마다 올라갈 계단들이 다릅니다. 각자마다 이번 생에서 마스터하고자 한 목표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수행을 통해 완전한 十鉅로 성장해간다는 점은 심우도(尋牛圖)의 ①심우(尋牛) ②견적(見跡) ③견우(見牛) ④득우(得牛) ⑤목우(牧牛) ⑥기우귀가(騎牛歸家) ⑦망우존인(忘牛存人) ⑧인우구망(人牛俱忘) ⑨반본환원(返本還源) ⑩입전수수(入廛垂手)라는 10단계를 연상시킵니다.

마지막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바로 완전히 투명해짐으로써 신과 함께 타인들을 일깨울 자격이 되는 완벽한 三極(天二三地二三人二三)의 협업모드와 통합니다.

죽간노자도 道(담마)의 메시지를 귀담아듣는 성인(聖人)은 솔선해서 무사(橆事) 무위(亡爲) 호청(好靑, 투명해지기를 좋아하기) 욕불욕(谷不谷, 욕심내지 않기를 욕망하기)이 됨으로써 백성이 잘되게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협업모드입니다.

 

깨달음이란 새롭고 놀라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그 개념을 체험으로 구현해내는 것입니다. 계단에 관해서 파악하기만 하지 말고 실제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책을 통해서 진리를 공부하는 실천이 아니라 실천하는 진리가 되도록 (우주가 대부분 기회를 제공하므로) 실제로 적용하려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천할 때에야 신의 선물인 담마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얼마 전 필자가 있는 곳을 방문한 甲이라는 분이 집으로 돌아갈 때 마침 비가 오시는데 고장 난 자동차 와이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아주 서행으로 운전해갔다고 합니다. 실상 本太陽의 七八九가 벌어졌으나 甲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우연으로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숨겨진 진실인 담마(本)가 있는데, 평소 신사인 甲은 특정 순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겪어왔음에도 자신은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날의 와이퍼 고장이 바로 甲 자신이 고장 상태임을 일깨워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太陽처럼 강력한 ‘와이퍼 고장’에서 ‘심리적 고장’ 그리고 ‘전방에 대한 시야 장애’에서 ‘앞에 대한 분별력 장애’라는 本을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本(담마)이 無盡할 것입니다. 우연을 가장해서 벌어진 고장과 장애가 바로 甲 자신의 것임을 알아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리고 힘들게 했던 그 고장과 장애가 바로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깨달음을 위해 신이 제공한 맞춤식 선물이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평균 99번은 오른쪽으로 가지만 1번은 왼쪽으로 가는 자동차는 명백히 고장이듯이 평소 아무리 친절로 가장해서 잘한다 해도 특수한 상황에서 폭력이 드러나는 甲도 명백히 ‘고장’이며, 영성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특별한 사람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장애’인 셈입니다.

비록 영성이론이 상당 수준에 이르고 상당 시간 명상하는 甲일지라도 언제나 제공되고 있는 담마를 알아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론을 모르거나 명상하지 않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실천을 위해 출가해서 출세간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재가의 삶이란 갇혀 있고 때가 낀 길이므로 재가에 살면서는 팔성도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출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이라는 현실에 적응하는 세간(世間 loka)의 삶이 있고, 수행을 쌓아 삼계(三界)에 적응하는 출세간(出世間 lokuttara)의 길이 있습니다.

해탈 ‧ 열반을 목적지로 삼고 수행을 업으로 삼고,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도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가 되며, 탐진치를 알아보고 중단하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면 출세간의 삶입니다. 그러나 몸은 출가했으나 상(相 nimitta)에 좌우되어 고루(痼漏āsava 번뇌)에 영향을 받거나 주도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출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출가(出家)가 수행에 도움되기는 하나 세속에 살면서도 몇몇 요건을 갖추면 출세간의 삶입니다. 붓다께서도 브라만이란 것이 신분이 아니라 행동과 실력이 좌우한다고 했듯이 출세간이라는 것도 외형적 신분에 좌우되지 않으며, 내적 마음가짐인 동기에 달려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로 돌리고, 세상 사람들이 경쟁하더라도 나는 양보하며, 세상 사람들이 법으로 해결하려고 할지라도 나는 귀결이 올 때까지 나 자신을 점검할 기회로 활용한다면 출세간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접대하면서 영업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편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세간의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번 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쇠를 강철로 만들기 위해 담금질해봐도 한방에 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완전한 10의 경지로 단련해가는 수행도 한 계단씩 차근차근 밟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행하는 지금의 방식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항상 의심하고 점검해가는 정진(선의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옳은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자체가, 제대로 된 자신만의 방식을 찾을 수 없게 하는 닫힌 태도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특정 단체나 스승이 제시하는 (옳은?) 방식대로 진행될 듯싶으나 실제로 수행해서 나아가보면 그대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자신만의 ‘길 없는 길’을 체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기에는 비슷하게 진행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진실을 알아채게 됩니다. 여기서 만일 용기가 있으면 빠르게 벗어나나, 만일 인간관계나 정(情)에 엮이면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안주하게 됩니다. 애초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수행보다 관계가 목적이 되고 맙니다.

실제 수행을 진행할 때 자신의 로드맵 대로가 아닌 자신에게 제시된 적합한 방식을 무시해버림으로써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승이나 집단의 방식대로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자신을 책하기도 합니다.

 

저도 외부에서 답을 차용했죠. 외부 방식으로 잘하려고 무척 애쓰는데도 내 뜻대로 안 되어 너무 괴롭기에 할 수 없이 숙고해보았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면 과연 잘 될까 염려한 계산에서 모험하지 않았던 몸사림이 있었고요. 나 스스로 깊이 사유해서 따져보며 분별하는 것이 힘드니 눈치로 인지도가 높은 대세를 따르는 것이 맞으리라는 깜냥에 후다닥 몸으로 때웠더라고요. 또 결과가 잘못되면 책임지지 않으려는 심보도 있더군요. 나 자신을 신뢰하고 도전하며 용기를 내는 힘든 길보다, 금방 해결될 듯이 혹하는 쉬운 외부 것을 덥석 받아들여 행동했더군요.

그리하고는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저 잘난 맛에 자만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외부 탓이라고 원망하면서도 계속 외부에 의존해서 기생해야 하니 하라는 대로 못했다고 자책하더군요. 결국, 저는 이렇게 되풀이하느라 진이 빠져버린 상태가 되어있지요.

외부 것을 내 답이라고 우기면서도 나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나에게 적합한 방식이 제시되어도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말씀에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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